재미있는 이야기

옛날 프로레스링 시리즈 2 - 김일 편

低山 2019. 12. 5. 04:08

 



옛날 프로레스링 시리즈 2 - 김일 편

 


 

 1950년대 중반 부산에서 장영철 등 몇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 프로레스링의 자생(自生)의 싹을 틔우고 있을 무렵, 호남지방에서는 고흥 출신의 장사 김일이 씨름판을 평정하고 있었습니다. 잘 생긴 얼굴에 체격 좋고 힘 좋은 김일, 수많은 씨름판의 트로피와 황소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습니다.

 

 더 이상의 상대가 없던 김일은 풍문(風聞)으로 "일본에서는 프로레스링이란 서양씨름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스모와 유도를 하던 많은 선수들이 프로레스링으로 전향하여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역도산이란 선수는 세계 제 일인자라 하더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프로레스링의 세계 제 일인자인 역도산 선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김일은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의 제자가 되어 프로레스링에 입문(入門)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1957년 부산에서 한국 프로레스링이 처음으로 정식 시합을 가질 무렵, 김일은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일본행 밀항선(密航船)에 몸을 실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역도산을 찾아간 김일을 역도산은 제자로 받아 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피나는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사각의 링에서 살아 남으려면 자신만의 특기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너는 한국인이니 박치기를 특기로 정하여 열심히 단련하여라." 라고 말하고, 그의 이마를 골프채로 가격하는 등 강도높은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체(下體)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김일은 하루에 3,000번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새끼를 감아 놓은 기둥에 이마가 부서지도록 박치기를 해댔습니다. 역도산 스승은 "연습만이 살길이다. 훈련이나 시합에서 얻은 부상은 연습을 통하여 치료해야 한다" 라고 김일 선수를 독려(督勵)했습니다.  

 

 1958년 12월, 드디어 김일 선수는 ’오오키 긴따로(大木 金太郞)’라는 링-네임으로 데뷔전을 가졌습니다. 그 후 5년간 일본 국내무대에서 맹 활약을 펼친 김일은 1963년 미국으로 원정(遠征) 진출하여 덩치 큰 외국선수들과 많은 시합을 소화해 냈습니다.

 1963년 12월 10일, ’관수 지르기’가 특기인 일본인 2세 Mr. 모토 선수와 한 조를 이뤄 김일 선수는 WWA 세계 태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간, 며칠 후 12월 15일 미국에 있는 김일에게 일본으로부터 청천벽력의 소식이 전해 왔습니다.

 

 김일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역도산이 하급(下級) 야쿠자의 칼에 맞아 복막염(腹膜炎)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밀입국자(密入國者)의 신분이었던 김일은 역도산이 신원 보증인 겸 후견인(後見人)이였기에 일본 체류가 가능했고 해외 원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 갈 수 없게된 김일 선수는 미국에 머물며 유명 선수들과 많은 시합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1965년 4월에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 철인(鐵人) 루테즈 선수에게도 도전하여 선전(善戰)했으나, 링 밖에서 날아온 의자에 머리가 찢어져 분패(憤敗)했습니다.

 

  김일 선수의 소식을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한국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1965년 6월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김일 선수는 1965년 8월 11일, 장영철 등 국내선수들과 힘을 합해 일본의 요시무라, 요시노 삿도 선수 등을 초청하여 ’극동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전을 개최하게 됩니다.

 

 대학생이 된 저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장충체육관에 입장하여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관전했습니다. 토나멘트로 벌어진 경기에서 장영철 선수는 1회전은 무난히 이겨 69연승을 달성하게 되었으나 2회전에서는 탈락, 무패(無敗)의 신화(神話)는 깨어집니다.

 반면에, 김일 선수는 무난히 토나멘트에서 우승하여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하게 됩니다. 일본의 반칙왕 요시무라 선수와 결승전에서 맡붙었는데, 부상당한 김일 선수의 다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요시무라 선수에게 고전(苦戰)하던 김일 선수는 2 :1로 역전승(逆轉勝)을 거두어 챔피언 밸트를 허리에 매게 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국내 데뷔전을 성황리에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여 극동 헤비급 챔피언을 차지한 김일 선수에게 박대통령으로부터 격려와 축하 전화가 왔습니다. 링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찬 김일 선수는 감격하여 박대통령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 TV화면을 통하여 전국에 생 중계되었습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는 법, 그 동안 고생하며 나름대로 한국 프로레스링을 일으켜 흥행을 주도(主導)하던 장영철 선수 등은 소외감(疎外感)과 허탈감(虛脫感)에 빠져 들었습니다. 또 장영철 선수를 따르는 선수들과 새로운 강자(强者) 김일 선수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양분(兩分)되어, 얼마 후 {박송남 납치 감금 사건}과 {장영철의 ’프로레스링은 쇼’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옛날 프로레스링 시리즈 3로 계속 이어집니다.

 

 

 

 

 

  

 김일, 장영철, 천규덕

 

 

 
 
 
금의 환향
  


 
 
역도산과 김일
 
    
 

 
 


 

사진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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