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低山 2019. 9. 14. 09:41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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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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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은 옛날에 죄(罪) 지은 벼슬아치들을 먼 변방(邊方)이나 외딴 섬에 보내어 살게 하던 형벌(刑罰)을

말합니다. 원래의 말은 귀향(歸鄕)으로, 죄를 지어 관직(官職)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만 해도 중죄(重罪)를 짓지 않은 이상 웬간하면 자신(自身)의

고향(故鄕)으로 내려 보내 비록 죄인(罪人)이지만 고향에는 친척(親戚)들과 재산(財産)이 있기에 그렇게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를 고향으로 내쫒는다는 뜻의 방축향리(放逐鄕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파(黨派)싸움이 심해지고 여러 번의 사화(士禍)에 의한 중죄인(重罪人)이 많아지자 고향으로 

내려 보내기보다는 멀고먼 변방이나 제주도(濟州島), 흑산도(黑山島) 등의 외딴 섬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명칭도 귀양보다는 유배(流配)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큰 일없이 유배(流配)로만 끝나면

다행(多幸)이었습니다. 유배지(流配地)로 향(向)하는 도중(途中)이나 유배지에 도착(到着)하여 기약(期約)

없는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고 있는 동안이라도 사약(賜藥)이 내려지는 날이면 이 세상(世上)을 하직(下直)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안절부절 못하고 화를 삭이던 선비들도 얼마 후에는 안정 

(安靜)을 되찾아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를 지으며 조용히 살게 됩니다.

당쟁(黨爭)의 산물(産物)인 사대부(士大夫)들의 쓰라린 유배생활 감정(感情)을 표출(表出)한 가사(歌辭)를

유배가사(流配歌辭)라 하고 그 외의 모든 글들을 합(合)하여 유배문학(流配文學)이라고 합니다.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된 조위(曺偉)가 유배지(流配地)인 순천(順天)에서

지은 만분가(萬憤歌)입니다. 작품(作品)의 내용(內容)을 보면 작자(作者)가 사화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心情)을 임금인 성종(成宗)에게 토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후대(後代)에 지어지는 유배가사의 일종(一種)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크게 영향(影響)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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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海南)이 고향(故鄕)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1612년(광해군 4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616년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橫暴)를

상소(上訴)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流配) 되었습니다.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辭職)하고 낙향(落鄕)했습니다. 1628년 별시문과

(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壯元)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승승장구

(乘勝長驅)하다가 1633년 모함(謀陷)을 받고 파직(罷職)되어 다시 낙향 고향에 은거(隱居)했습니다.

1636년(인조 14년) 고산 윤선도는 해남 고향집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발발(勃發)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남인(南人)집안 해남 윤씨의 종손(宗孫)인 그는 왕(王)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을 갔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가 없어 집안사람과 하인(下人)들까지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왕을 돕고자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강화도마저 함락(陷落)당하고 왕이 삼전도(송파)에서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服)을 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비통(悲痛)한 심정(心情)을 참지 못하고 세상(世上)을 피해 살기위해 제주도

(濟州島)를 향해 뱃머리를 돌려 가던 중 풍랑(風浪)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잠시(暫時) 배를 대고

피하였는데, 맑디맑은 물 위로 그림 같은 섬들이 이어지는 다도해(多島海)의 끝자락이며 유난히도 수풀이

우거진 보길도의 자연(自然)에 취해 눌러 살기로 결심합니다. 주역(周易)과 풍수지리(風水地理)에도 밝았던

윤선도는 섬 전체(全體)를 구석구석 살폈습니다. 그는 섬 전체 하늘과 바다, 산(山)과 평지(平地)에 걸쳐

거대(巨大)한 정원(庭 園)을 조경(造景)하고 섬의 산세(山勢)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부용동(芙蓉洞)

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거처(居處)인 낙서재(樂書齋)를지었습니다. 고산(孤山)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다음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후 자연과 벗하며 낙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고, 배를 띄우고 풍류(風流)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고산 윤선도는 이 후에 

남인세력(南人勢力)이 득세(得勢)하면서 조정(朝廷)에 나간 적도 있고 귀양을 산적도 있었지만 여든다섯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 마음을 항상 이곳 부용동에 의탁(依託)하였습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하는 노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주옥(珠玉)같은 ''오우가(五友歌)''

등 그의 수많은 우리말 시가(詩歌)들이 모두 이곳에서 탄생(誕生)했습니다. 윤선도는 부용동 전체를 조망(眺望)

할 수 있는 낙서재에 음식물과 생필품(生必品)을 나르기 위해서 산 아래와 도르래 장치(裝置)를 이용하여 일종

(一種)의 케이블카를 설치(設置)했습니다. 370년 전에 이런 과학적(科學的)인 생각을 하고, 생활(生活) 속에

실용화(實用化) 시킨 고산(孤山)의 지혜(智慧)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고산 윤선도는 차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이곳에는 ‘차바위’라 이름 지어진 너른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차를 달이거나, 홈을 파 찻상을 고정

(固定)했다거나, 고요히 앉아 한 잔 따뜻한 차를 마시며 풍류(風流)와 삶을 명상(冥想) 했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전해져 옵니다.

 

         (네이버 백과와 심세중 님의 ‘윤선도, 보길도를 만나다’를 참조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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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기도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나주(羅州)

정씨(丁氏) 정재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남인(南人)의 양반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 등 지방

수령(地方首領)을 역임(歷任)했습니다. 해남(海南) 윤씨(尹氏)인 어머니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후손(後孫)

이며 유명한 화가(畵家) 윤두서가 친 할아버지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그의 학문(學文)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열세 살 때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書籍)을

섭렵(涉獵)하였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가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다시 기용(起用)되자 아버지를 따라 한양

(漢陽)으로 올라갔는데 이때부터 남인의 명사(名士)들과 가까이 지내게 됩니다.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李昇熏) 등을 통하여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얻어 읽고 실학(實學)에 심취(心醉)하게 됩니다.

한편 다산은 이벽과 친하게 지나게 그로부터 서양문물(西洋文物)을 접하여 새로운 과학지식(科學知識)을

받아들이고 천주교(天主敎)를 믿게 되었습니다. 스물 한살에 회시(會試)에 합격(合格)하여 진사로 성균관

(成均館)의 학생(學生)이 된 그는 그 이듬해 <중용(中庸)>에 대한 그의 논문(論文)이 정조(正祖)에 눈에

들어 칭찬을 들었고 임금에게 <중용>을 강의(講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물여덟이 되는 해 9월에는

정 5품인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任命)되어 임금의 제반정책(諸般政策)을 상주(上奏)하는 소임

(所任)을 맡았습니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才氣潑剌)한 다산(茶山)을 측근(側近)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諮問)을 구했습니다. 그 무렵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찾아

일 년에 몇 번씩 수원(水原)의 능행길에 올랐었습니다.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의 설치(設置)를 다산에게

맡기자 그는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水原城)을 쌓을 적에도

이 일 또한 다산에게 맡겼습니다. 다산은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機具)의

발명(發明)에 골몰했습니다. 또 기하학적(幾何學的) 방법(方法)으로 성(城)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測量)

하여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에 노력(努力)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도르래(滑車)를 이용하여

거중기(擧重機)와 고륜(바퀴달린 달구지) 등을 발명하여 성(城)의 축조(築造)에 이용했습니다. 

정조는 완성(完成)되 성(城)을 둘러보고 감탄(感歎)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중기를 써서 돈 사만 냥을

절약(節約)했구나 !“ 이때부터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임(信任)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영의정(領議政)인 채재공(蔡濟恭)의 뒤를 이을 인물(人物)로 장년층(長年層)에서는 이가환, 

청년층(靑年層)에서는 정약용을 의중(意中)에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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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이 서른두 살 되던 해인 1794년에 연천 현감(縣監)인 서용보가 농민(農民)들을 수탈(收奪)하는 등

횡포(橫暴)가 심하다는 소문(所聞)이 조정(朝廷)에 까지 들려 왔습니다. 정조는 다산을 경기도(京畿道)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任命)하여 비리(非理)를 조사(調査), 척결(剔抉)하도록 하였습니다.

순찰(巡察)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서용보의 협잡 사실(挾雜 事實)을 있는 그대로 보고(報告)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봉고파직(封庫罷職)되고 벌을 받은 서용보는 두고두고 다산을 미워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

트집을 잡게 됩니다. 1797년 벼슬이 승지(承旨)에 까지 오른 다산은 모함(謀陷)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辭意)를 표하고 물러났습니다. 곧 지방관(地方官)인 황해도(黃海道)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되어

흉흉(兇兇)한 민심(民心)을 가라앉히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습니다. 다산은 곡산에서 지방행정(地方行政)을

쇄신(刷新)하고 창궐(猖獗)하던 불치(不治)의 전염병(傳染病) 두창(痘瘡, 마마)를 예방치료(豫防治療)

하였습니다. 다산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농업기술(農業技術)은 물론 그 당시로서는 첨단과학 

의술(尖端科學 醫術)인 종두법(種痘法)을 연구(硏究)하고 시술 접종(施術 接種)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곡산부사 시절(時節)이 선정(善政)이 훗날 다산을 사형(死刑)에서 유배(流配)로 감형(減刑)을 받게

하는 요인(要因)이 되기도 합니다. 1799년 정조는 다산에게 병조참의(兵曹參議)의 벼슬을 주어 측근(側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고(自古)로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가 아픈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라 했듯이, 다산에 대한 반대파(反對派)들의 모략(謀略)은 끈히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화진이라는 

자가 “이가환, 정약용 등이 서학(西學)을 받들면서 역적(逆賊)을 모의(謀議)한다.“는 상소(上訴)를 올렸습니다.

다산은 더 이상 반대파의 모략을 견디기 어려워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마재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당호(堂號)를 여유당(餘裕堂)이라고 지었는데 이것은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1801년(순조 1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공서파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켜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구실로 남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다산도 이가환과 함께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조정대신(朝廷大臣)들은 다산만이라도 석방(釋放)해야 한다고 주자하였으나 서용보가 끝내 반대

(反對)하여 결국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갑니다. 셋째 형 약종과 이가환은 옥중에서 맞아 죽었고,

둘째 형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형(流刑)되었습니다. 그 후 황사영 백서(帛書)가 발각(發覺)되자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 임) 반대파는 이 기회(機會)에 다산을 잡아 죽이고자 합니다.

그 때 마침 황해도에서 지방관의 임기(任期)를 마치고 돌아온 정일환이 다산이 과거(過去) 지방관으로

있을 때 쌓은 공적(功績)을 들어 변호(辯護)함으로써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다산은 강진으로,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流配地)를 옮기게 되는데 결국 형 정약전은 유배 중에 사망(死亡)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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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山蔽大山(소산폐대산) :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려 보이지 않는데, 


   遠近地不同(원근지부동) : 멀고 가까운 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일곱 살 때 지었다는 시(詩)입니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山) 때문에 멀리 있는

큰 산(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작은 산(山) 뒤에 있는 큰 산(山)을 보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내면화(內面化)된 정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可能)한 일입니다. 이 두 줄의 짧은 시(詩)에서

어린 다산(茶山)의 번득이는 직관력(直觀力)과 천재성(天才性)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산(茶山)이

유배(流配)된 전라남도 강진에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後孫)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산이 유배 중 거처(居處)인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원래(原來)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살던 

해남(海南) 윤(尹)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이 지은 산정(山亭)이었습니다. 다산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朝鮮時代) 3재(三齎, 공재, 겸재, 현재)의 한사람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孫女)이고,

윤두서는 다시 고산(孤山)의 증손(曾孫)이니,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는 다산(茶山)에게는 외가(外家)쪽으로

친적(親戚)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因緣)으로 윤단은 다산을 만덕산(萬德山) 기슭의 초당(草堂)에 모셔다

자신(自身)의 장남(長男) 윤문거(尹文擧)를 비롯한 삼형제(三兄弟)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그 소문(所聞)이 널리 퍼져 나중에는 18명이나 되는 제자(弟子)들이 다산초당으로 모여들어 배움을 청하였습니

다.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또한 자신의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著述活動)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차를 즐겨 마시며 다산초당 옆에는 연못을 만들고, 나무 홈을 파서 계곡(溪谷) 물을 끌어들여 그 연못으로

폭포수(瀑布水)가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만덕산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서 연못 가운데

탑(塔)처럼 쌓았으며, 못 주변(周邊)에는 백일홍(百日紅)과 대나무를 심어 운치(韻致)를 더하게 하였습니다.

그 탑(塔)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다산은 18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

(流配生活)을 하다가 1818년 유배가 풀려 고향(故鄕)에 돌아와 저술활동(著述活動)을 하다가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진 유배생활 18년과 고향에서의 18년간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은 수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습니다. 대표저서(代表著書)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이 있습니다. 

 

      (경향신문 2004년 9월 30일자 소설가 엄광용씨의 ‘유배지 기행’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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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째,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처음에는 안절부절 못하고 화를 삭이던 선비들도 얼마 후에는

          안정(安靜)을 되찾아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를 지으며

          조용히 살게 됩니다. 당쟁(黨爭)의 산물(産物)인 사대부(士大夫)들의 쓰라린 유배생활 감정(感情)을

          표출(表出)한 가사(歌辭)를 유배가사(流配歌辭)라 하고 그 외의 모든 글들을 합(合)하여 유배문학

          (流配文學)이라고 합니다.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된 조위(曺偉)가

          유배지(流配地)인 순천(順天)에서 지은 만분가(萬憤歌)입니다. 작품(作品)의 내용(內容)을 보면 작자

          (作者)가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心情)을

          임금 성종(成宗)에게 토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후대(後代)에 지어지는 유배가사의

          일종(一種)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크게 영향(影響)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

          (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

          (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

          (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質)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입니다.

 

둘 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혈연적(血緣的)으로 남이 아니라는

          사실(事實)입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海南) 윤(尹)였습니다. 해남 윤씨는 조선(朝鮮)에서 알아주는

          명문(名門)의 집안이었습니다. 윤씨의 인물(人物) 중 가장 유명(有名)한 분이 고산(孤山) 윤선도

          (尹善道)였고, 그 다음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재는 조선의 삼재

          (三齎,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화가(畵家)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고산의 증손(曾孫)이

          공재요, 공재의 손녀(孫女)가 다산의 어머니 윤씨였습니다. 그렇다면 고산은 다산의 6대조 외할아버지

          가 되는 것입니다.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부(外曾祖父)입니다. 그리 보면 다산의 문재(文才)와 그림솜씨

          가 외가 쪽 할아버지들인 고산과 공재의 유전적(遺傳的) 재질(才質)도 절반정도 계승(繼承)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산의 친가(親家)는 어떤 가문일까요. 8대 옥당(玉堂, 홍문관) 집안이자 9대

          옥당 집안이라고 자랑하던 집안입니다. 다산의 12대 할아버지인 정자급(丁子伋)이라는 분이 조선왕조

          (朝鮮王朝) 초기(初期)에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이후(以後) 5대조 정시윤(丁時潤)에 이르기까지

          내리 8대에 이르도록 옥당의 벼슬을 지낸 명문(名門)이라는 뜻입니다. 다산의 고조부(高祖父)의

          아우가 옥당벼슬을 지내서 9대 옥당집안이라고도 합니다.  다산 자신(自身)도 홍문관 교리를 지내

          옥당벼슬을 하였으니 대단한 가문(家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선조(先祖)

          중에 한 사람만 옥당에 들어가도  ‘옥당집’이라는 아름다운 호칭(呼稱)을 얻기 마련인데 연달아

           8~9대가 옥당의 벼슬을 지냈다면 대단한 집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 째,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

          (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

          (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

          (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

          (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로서 조위(曺偉)와 정철(鄭澈)

          의 작품(作品)들과는 차원(次元)을 달리하고 있고, 고산 과 다산의 집안이 조선(朝鮮)의 내노라하는 

          명문가(名文家)로서 혈연적(血緣的)으로도 연결(連結)되어 있지만, 정말로 하늘에 보화(寶貨)를 쌓고 

          천상영복(天上榮福)을 누리는 두 가문(家門)의 후손(後孫)들은 따로 계셨으니, 다산 정약용의 친가

          (親家)와 외가(外家)의 가계(家系)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정재원은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 첫째 아들 정약현을 낳았고, 정약현의 처남(妻男)이 

          초기(初期) 천주교(天主敎) 전파(傳播)에 큰 영향(影響)을 끼친 이벽이고, 정학현의 딸이 황사영 백서

          를 쓰고 순교한 황사영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고, 정재원은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세 아들과 딸을 두었으니 딸은 조선 최초의 영세자(領洗者)인 이승훈에게 시집을 

          갔으니 정재원은 이승훈의 장인이고, 둘째 아들 정약전은 다산과 같은 시기(時期)에 흑산도로 유배를

          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著述)하였으며, 셋째 아들 정학종은 신유박해(辛酉迫害)때 맏 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殉敎)하였으며, 정학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과 부인 유 세실리아, 딸 정정혜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였으며, 정약용은 넷째 아들로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고산 윤선도의

          6대손(六代孫)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종 6촌형인 윤지충 부모(父母)의 위패(位牌)를 불태웠다하여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 함께 조선(朝鮮) 최초(最初)의 순교자(殉敎者)가 되었습니다.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시리즈 1, 2, 3, 4, 5, 6  끝

 

 

 


  

다산 초상

 


 

거중기 



 

 정약전 초상



↑ 이미지 출처 - 인터넷




김민기  봉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