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왕십리(往十里)와 중앙탑(中央塔)

低山 2019. 10. 21. 08:45



왕십리(往十里)와 중앙탑(中央塔)


                                                   2003. 1. 8



 조선 건국초, 송도(개성)에서 등극한 이성계(태조)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새 도읍지를 찾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무학대사는 옛부터 신령스런 산(山)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리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부족한감이 있어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이틑날 아침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로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無學)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굽은 길로 들어 서느냐?" 순간 무학대사는 귀가 번쩍 뜨여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얼른 노인앞으로 달려가 공손히 합장하여 인사를 올리며 "지금 소한테 꾸짖으심은 무슨 뜻의 말씀인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 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은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 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제가 바로 무학입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요."라는 스님의 말에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여기서 부터 10리를 더 들어 가서 주변 지세를 살펴 보도록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어른,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스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습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자리 근처였습니다.

 

 "과연 명당이로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띠운 스님은 그길로 태조를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짖기로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을 갈 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 왕십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발췌-한국불교전설99(우리출판사)]

 

 

                            *             *             *

 

                 

 예로부터 충주지방(중원)은 물길과 육로를 통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망과 양질의 철(鐵)의 산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탐내어 각축을 벌이던 지역으로 그 주변에 아직도 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북방진출에 성공한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 이 지방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 때인 475년에서 492년 경으로 생각됩니다. 충주를 장악한 고구려는 이곳을 ’국원성(國原城)’이라 했는데 국원이란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을 장악한 고구려는 국원성을 남방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며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구축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이를 기념하는 상징적인 비(碑)를 세웠는데 그 비가 바로 1979년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충주를 지배한 기간은 551년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완전 복속되기 까지 약 6~70년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라가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 백제와 연합을 시도하고 고토회복 작전을 펴는 548년부터 551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551년에 진흥왕이 충주지방의 하림궁(탄금대로 추정)을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안을 살피며 돌아다님)하고 이후 557년에 국원을 소경(小京: 신라때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방에 특별히 두었던 작은 서울)으로 승격시켜 ’국원소경’ 이라 했습니다.

 

 충주는 왕경(王京)인 경주에 버금가는 정치,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남진(南進)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과 같이 신라는 이곳을 삼국통일 정책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후 충주는 통일신라의 중심지로서 경주 다음의 도시로 대접받으며 성장합니다. 673년(문무왕13) 9월에 국원에 경주의 성보다 규모가 큰 성(둘레 2,592보)을 축성했다는 기록이라든지, 757년 국원소경이라는 이름을 중원소경으로 고친 것등을 통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원성왕 때 국토의 중앙에 기념비(記念碑)적인 석탑(7층,높이14.5m)을 세웠으니 흔히 중앙탑(中央塔)으로 불리우는 탑평리 7층석탑(국보 제6호)입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탓다는 탄금대에서 창동을 지나 가금면을 향하면 남한강변에 인접한 마을 탑평리에 이르는데 중앙탑은 천여년 세월을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통일신라 원성왕때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같은 보폭(步幅)을 가진 건각자(健脚者: 걸음을 잘 걷는 사람)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 시키면 꼭 이 곳에서 만났기에 이 탑을 세워 신라 국토의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사실은 현대의 항공사진에 의한 과학적인 측지(測地) 방법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합니다.

 

 

                              *           *           *

 

 

 고려 태조 왕건은 중원경을 충주로 개칭하였고 충렬왕3년 충주성을 개축할 때 성벽에 연꽃을 조각하였으므로 예성(蘂城)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때는 고려의 제도와 예성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세종 31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변경할때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 충청도라 개칭하고 충주에는 좌감사를 배치하였습니다.

 

 그후 영남지방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가는 유생들이 조령(鳥嶺: 문경새재)을 넘어 충주를 거쳐 한양에 당도했듯이 충주를 거치는 길이 남쪽에서 중앙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국토를 유린하며 쳐 올라온 길도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이렇듯 국토를 종단하는 지름길의 길목이었으며 문화의 중심지였던 충주는 일제시대에 들어와 평야지대인 기호(畿湖), 호남(湖南)지방의 쌀 등 식민지 수탈의 목적이 없지 않았던 경부선철도의 부설로 그 빛을 잃고 도청소재지마저 서쪽의 청주에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충주는 인구집중과 산업공해에서 벗어나 쾌적한 자연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넓은 들과 주변에 충주호, 월악산 국립공원, 수안보 온천등 으로 둘러 싸여 있어 말그대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이 된 것입니다.

 

 생활용수, 공업용수, 농업용수, 전력공급, 홍수조절, 주변관광등 여러 목적을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세워진 충주 다목적댐은 1978년 6월 공사를 착수한이래 8년 6개월만인 1986년 10월에 완공되었는데, 이 댐의 완공으로 한강 인도교의 홍수위를 1m 이상 저하 경감시키고 연간 33억8천만입방m의 각종용수를 공급해 경인지역과 남한강 유역권의 용수난을 해결하는 한편, 연간 8억4천4백만KWH의 전력을 생산 공급하여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내륙의 바다’라 일컬어지는 충주호가 지척에 있는 충주시는 전혀 물부족 사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단 옷에 꽃 그려 넣듯이(錦上添花)’ 2002년 12월 20일에는 여주~구미간 중부내륙고속도로 중 여주~충주 구간이 개통되었습니다. 구미~상주 구간도 이미 개통되었고 나머지 충주~상주간도 공사중이라 곧(2004년) 개통될 예정입니다. ’나중난 뿔이 우뚝하다’라고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에 이어 마지막 4번째로 건설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야 말로 가장 곧게 잘 만들어져 수도권과 남부지역을 가장 빠르게 연결시켜 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지난 12월24일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양평 구간이 착공 되었으며 이어 양평~화도구간도 착공될 예정이며, 궁극적으로는 의정부와 동두천 외곽을 거쳐 연천까지 이어져 국토 남부에서 서울도심을 거치지 않고 휴전선에 이르러 통일을 대비하게 됩니다.

 

 남북을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뿐 아니라 아산, 평택, 안성, 음성, 충주, 영월, 동해등 동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도 일부 개통되었거나 공사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동서남북을 잇는 고속도로가 완성되는 날이면 충주는 그야말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국토 중심지가 되어 옛 위상(位相)을 되찾을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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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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