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1, 2, 3 합편

低山 2019. 7. 19. 10:29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1, 2, 3 합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大王(Alexndros the Great, BC 356-323)은 페르시아와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정복(征服)한 다음 이란 고원을 거쳐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印度)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BC 324년에 군대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遠征)을 준비하던 중 이듬 해(BC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大王은 학문(學文)에도 관심이 많아서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마케도니아의 수도(首都)인 펠라의 궁정(宮庭)에 초빙하여 3년 동안 그에게서 윤리학(倫理學), 철학(哲學), 문학(文學), 정치학(政治學), 자연과학(自然科學), 의학(醫學) 등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메네쿰스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하학(幾何學)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정치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 잠시 짬을 내어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지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大王은  "내가 이래뵈도 大王인데 이 권위로 좀 더 쉽게 그리고 빨리 배우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스승인 메네쿰스에게 물었습니다. 메네쿰스는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왕님 ! 대왕님의 나라에는 대왕님의 전용도로(專用道路)나 사유도로(私有道路)가 있어 누구보다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나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 일화(逸話)에서 "학문(學文)에는 왕도(王道, 지름 길)가 없다."라는 격언(格言)이 생겼다 합니다. 학문을 사랑한 알렉산더 大王은 평소에 호메로스의 시(詩)를 애독하며 원정 때도 많은 책을지니고 다녔으며, 학자와 기술자들을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探險)과 측량(測量) 등을 시켰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는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여개나 건설하여 이 도시들이 헬레니즘 문화의 거점이 되는 동시에 동서문화(東西文化)의 교류와 융합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정복자로 세계사에서 영웅의 한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大王은 백성들에게 경애(敬愛)와 신망(信望)의 대상이자 용(勇)을 겸비한 지장(智將)이었습니다.

 

      *                                            *                                              *                                              *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은 BC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오늘날의 스페인)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大王의 사후(死後) 헬레니즘 세계가 분열되어 있던 그 시기,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地中海)의 패권(覇權)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카르타고는 BC 8세기 페니키아 人이 北 아프리카 튀니스 만(灣)에 건설한 도시국가인데, 로마 人들은 카르타고를 '페니키아'라는 의미의 라틴語로 '포에니'라고 불렀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마침내 시칠리아 섬에서 격돌했습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이 일어난 것입니다. 카르타고에 비해 해군력이 약했으나 로마는 함대(艦隊)에 신형장비를 장착하여 새로운 전술을 선보임으로써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이 전쟁은 시칠리아 인근(隣近) 바다에서 23년간 계속되었지만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해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떠나는 조건으로 강화(講和)를 맺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6살의 어린아이였던 한니발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 하밀카르 장군을 따라 에스파냐로 들어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에스파냐의 총사령관이 되자 20대의 젊은이였지만 한니발에게는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크나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우선 공고(鞏固)히 해 놓고 여러 부족(部族)을 평정(平靜)한 뒤, BC 219년 드디어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합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한니발은 해로(海路)를 택하지 않고 육로(陸路)를 택했습니다. 그는 피레네 산맥(山脈)을 넘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니발 군대의 병력은 보병(步兵)5만 명, 기병(騎兵) 9천 명에 코끼리 37마리 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중 기병(騎兵) 9천 명은 세계전사상 몽골 족과 더불어 기마술(騎馬術)이 능하고 가장 용맹무쌍하다는 아프리카 북부 누미디아의 잘 훈련된 기병(騎兵)이었습니다. 그들과 갈리아 지방의 겔트 족들은 한니발의 용맹성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기꺼이 용병(傭兵)이 되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로마가 한니발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하고 시칠리아, 아프리카, 에스파냐로 군대를 보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니발의 군대는 론 江을 건너 알프스로 향했니다. 코끼리 부대를 포함한 대군(大軍)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추위와 눈사태와 싸우고, 곳곳의 고지(高地)에서 돌을 굴리며 공격하는 소규모 갈리아 부족(部族)들과 싸우며 한니발은 보름만에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일찍이 어느 장군도 생각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일을 해낸 한니발은 어느 누구보다도 용맹(勇猛)스러운 용장(勇將)이었습니다.
         

     *                                               *                                              *                                              *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Scipio, BC 235-183)는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 보다 12살 연하(年下)로 한니발이 BC 219년에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 제 2차 포에니 전쟁)하여 알프스를 넘어와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軍을 격파하고, 특히 BC 216년에 칸나에 전투에서 기병(騎兵)을 이용한 용병술(用兵術)을 발휘하여 로마 軍에 대승(大勝)을 거두었을 때, 19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출전했던 스키피오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소년시절부터 한니발과의 전투경험을 통하여 스키피오는 전투에서 기병(騎兵)의 중요성을 깨닫고 앞으로의 수 많은 실전(實戰)에서 응용하게 됩니다. BC 211년 24세의 스키피오는 자격요건이 16세나 모자랐지만 착한 천성(天性)과 냉철한 지혜(智慧), 전투에서의 용맹성(勇猛性)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 공화정(共和政)의 집정관(執政官)에 선출되었고, 그 이듬해 아버지가 전사한 에스파냐 전선에 파견되어 이 때부터 그의 빛나는 전력(戰歷)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이름높은 네 명의 장수(將帥) 하스드루발,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한노를 연달아 격파하여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축출하고 로마 세력권에 편입 시켰습니다. 스키피오는 4년만에 에스파냐를 평정(平靜)하고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半島)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로마 원로원(元老院)의 승인을 얻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뒷통수를 쳤듯이 카르타고 본국(本國)에 침입합니다. 다급해진 카르타고 본국의 요청을 받은 한니발은 헤라 신전(神殿)에 자신의 업적을 새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회군(回軍)합니다. 이렇게 만나게된 두 명장(名將)이 벌인 전투가 세계전사상 그 유명한 "자마 회전(會戰)''입니다.

 한니발은 16년 로마 원정(遠征)탓으로 기병(騎兵)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스키피오는 좋은 인간성 때문에 누미디아의 왕자인 마니시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에스파냐에서 포로로 잡았던 마니시사를 살려서 풀어준 적이 있기 때문에 마니시사가 누미디아 기병(騎兵)을 보내 준 것입니다. 한니발도 물론 누미디아의 또 다른 왕자 사팍스에게 기병(騎兵) 2천 騎를 요청하고 약속을 받았지만 끝내 사팍스의 기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스키피오의 인간미(人間美)와 덕(德)에 매료된 누미디아 기병(騎兵)과 로마 시민군(市民軍)의 감투에 한니발이 카리스마로 이끄는 용병(傭兵)들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희대(稀代)의 명장(名將) 한니발은 결국,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한니발이 용(勇)을 겸비(兼備)한 지장(智將) 알렉산더에게 용맹성(勇猛性)을 배우고 물려받은 용장(勇將)이라면, 스키피오는 알렉산더의 지혜(智慧)와 용맹성(勇猛性)에 덕(德)을 보탠, 지(智)와 한니발의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이었습니다.             

 

 ( 다큐멘타리 필름과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 끝 -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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