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아쿠장과 살쿠지 다리

低山 2019. 7. 6. 20:16


 아쿠장과 살쿠지 다리

 

                                                                                                       2003. 6. 8

 

 조선 전기(朝鮮 前期)의 문신(文臣) 한명회(韓明澮)는 태종 15년(1415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임신한지 7개월만에 낳았으므로 칠삭둥이 재상(宰相)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자랐는데 그의 할아버지 문간공(文簡公)께서 그를 항상 비범한 인재로 생각하였으나 과거(科擧)에도 담담하고 가정이나 사업에도 또한 마음을 쓰지 않고 사방에 돌아다니며 강호 풍월(江湖 風月)에 도취하면 일년동안이나 귀가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합니다.

 

 그러다가 문종 2년(1452년) 늦은 나이(38세)에 처음으로 경덕궁직(慶德宮直)이라는 벼슬에 오르더니 그 후 친구인 교리(敎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등 30여명을 추천,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軍器綠事)가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시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한 그는 세조, 예종, 성종임금을 거치면서 성종18년(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승지, 판서, 관찰사, 영의정등 안 해본 벼슬이 없었고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고 정난공신 1등, 익대공신 1등 등 네차례나 1등공신이 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쿠테타와 모살(謀殺)과 옥사(獄事)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후에 신원(伸寃)되기는 하였지만 1504년(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윤비(尹妃)의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禍)를 입은 권력자(權力者)이기도 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명회는 부인이 셋에 11남 9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 부인 여씨는 일찍 죽고 정씨, 이씨의 두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부인들에게는 엄(嚴)하여 집안에서 부인들을 높이 받드는데 소홀(疎忽)했던 점이 있었나봅니다. 어느날 세조가 한명회의 집에 방문하니 정, 이씨 양 부인이 뜰에 엎드려 그 원통한 사실을 울면서 하소연하매 왕이 형수(兄嫂)라 부르며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어필(御筆)로써 직접 써서 교지(敎旨)를 전하고 양 부인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봉하는 옥새(玉璽)를 눌러주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양 부인을 예(禮)로써 대했다고 합니다.

 


 만년(晩年)에 한명회는 ’속된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가에 머물며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라는 뜻이 담겨진 자기의 호 압구정(狎鷗亭)의 이름을 따 관직을 떠난 뒤라도 언제라도 임금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 별장(別莊)을 짓고 머물렀습니다. 현재의 압구정동 465번지(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지어졌던 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으나 그 자리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표석(標石)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압구정이 얼마나 컷으며 얼마나 화려(華麗)했는지를 소상(素像)하게 알리는 사료(史料)는 없으나, 멀리 명(明)나라까지 그 운치(韻致)와 화려함이 소문이 나서 조선으로 온 중국의 사신(使臣)들이 너도나도 압구정에서 연회(宴會)를 베풀기를 간청하는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재상들이 삼개나루(마포)등에 정자(亭子)를 짓고 풍류(風流)를 즐기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었는데 칠삭동이 재상이자 사위를 임금의 자리에 까지 끌어 올렸던 한명회는 별장터 고르는 안목(眼目)도 한 수 높아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의 차아(嵯峨)한 모습이 바라보이는 강 건너에 압구정을 짓는 혜안(慧眼)에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                                   *                                     *                                   *

 


 이태조가 그의 계비(繼妃)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고 정도전이 세자를 두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제 5왕자 방원(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 소생의 두 아우와 이를 두둔하는 공신들을 살해했는데 이에 격분(激憤)한 태조는 함흥 별궁(別宮)으로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태종이 아버님의 분노를 가라안치려고 사신(使臣)을 보내면 보내는 족족 감금하거나 살해하였기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신을 이르는 것으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유일(唯一)하게 목적을 이루고 돌아온 함흥차사가 박순이었는데 그는 새끼말과 어미말을 따로 떼어 별궁앞에 몰고가서 어미 찿는 망아지의 애처로운 울음을 아버지 태조를 그리는 태종의 심정(心情)으로 비유(比喩), 성난 태조의 마음을 녹이고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온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동교(東郊; 뚝섬 벌)로 나가서 장막(帳幕)을 설치하고 환영연(歡迎宴)을 준비하는데 가장 신임하는 측신인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이 "상왕(上王)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신중히 생각해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열 아름은 되는 큰 나무로 장막 기둥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돌아오던 이태조가 장막 앞에서 서성이는 태종을 보자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활을 당겨 태종을 쏘았는데 태종이 황급히 기둥을 안고 몸을 피하니 서너 화살이 기둥에 꽂히고 화(禍)를 면하였으니 그때부터 중랑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곳이 ’살곶이 벌’의 지명(地名)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살곶이 벌’의 유래(由來)에 대하여 좀더 신빙성(信憑性)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동(東)에서 서(西)로 흐르는 한강(漢江)과 북(北)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중랑천(中浪川)이 합하는 이곳은 자연히 평야(平野)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朝鮮 初)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牧場)이 되었고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습니다. 태조(太祖)는 즉위 3년 아직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뚝섬 벌)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는데 이때 응봉(鷹峰: 응봉동과 금호동 사이에 있는 산 봉우리)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도요연(桃夭淵: 뚝섬 벌 목장 말들의 음료로 사용했던 지금의 살곶이 다리 부근)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 위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합니다. 한편 ’살곶이 벌’은 국왕(國王)의 군대사열장(軍隊査閱場)으로도 이름났던 곳이었습니다.

 


 이렇듯 ’살곶이 벌’은 예로부터 목장, 사냥, 상춘(賞春)놀이 등으로도 유명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교통의 요충(要衝)이기도 했습니다. 동(東)족으로 나가는 길은 광나루를 거쳐 강릉 방면으로 향하고, 동남(東南)쪽으로 나가는 길은 송파나루를 거쳐 충주 방면으로 향하고, 그 다음 남(南)쪽으로 나가 뚝섬나루에서 강을 건너 말죽거리(양재동)을 거쳐 과천을 지나 호남(湖南)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관동(關東), 영남(嶺南), 호남(湖南)을 잇는 관문(關門)인 이곳 살곶이 벌을 역대 임금들은 중요시(重要視)하여 세종 2년(1420년) 5월에 이곳에 다리를 축조(築造)를 명하여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리는 성종 13년(1482년)에야 완공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그 탄탄함이 반석(盤石)같다고 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 불렀습니다. 이 돌다리는 네모의 돌기둥으로 된 교각(橋脚)위에 장대석(長臺石)을 건너지른 후에 다시 동틀돌을 놓고 청판돌을 깔아 만든 것입니다. 다리 형태(形態)가 종횡(縱橫)으로 곡면(曲面)을 이루어 잘 조화(造化)되어 있고 질박(質朴)하고 호쾌(豪快)한 느낌을 줍니다. 다리의 길이는 76m, 폭은 6m입니다.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살곶이 다리’는 1967년 12월 15일 사적(史蹟) 제 160호로 지정되었으며, 1972년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復原)하였는데, 이때 하천의 폭(幅)이 옛날보다 넓어져 동쪽은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 증설(延長 增設)하였습니다.

 


 ’살곶이 다리’가 위치한 ’살곶이 벌’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동서(東西)로 흐르는 한강(漢江)과 북(北)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中浪川)이 합치는 곳으로서, 이러한 합수머리에는 많은 물고기가 모여들기에 어김없이 물고기가 잘 잡힙니다. 또 지금은 수질 오염(水質 汚染)으로 고기를 잡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잡는다 해도 먹을 수가 없지만, 불과 한 세대(3, 40년)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천혜(天惠)의 낚시터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中盤) 이승만 대통령 시절, 현대판(現代版) 환관(宦官)과 간신(奸臣)들이 연세(年歲)높은 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인(人)의 장막(帳幕)을 치고 아부(阿附)와 과잉충성(過剩忠誠)으로 나라가 병들어 가고 있을 때, 대통령께서 살곶이 다리로 낚시를 나갔는데 이때 수행(遂行)한 모 장관(某 長官)이 대통령께서 방귀를 한방 터뜨리자 곧 바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한마디 하였다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퍼진 이 말은 아부성 발언(阿附性 發言)의 전형(典型)으로 당시 많은 국민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지금까지도 전설(傳說)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                                     *                                   *

 


 저는 이상(以上)에서와 같이 조선 전기(朝鮮 前期)의 문신(文臣) 칠삭둥이 재상(宰相) 한명회(韓明澮)와 그의 별장(別莊) 압구정(狎鷗亭), 조선시대(朝鮮時代) 최장(最長)의 돌다리인 ’살곶이 다리’의 유래(由來)와 그에 얽힌 전설(傳說), 이승만 독재정권(獨裁政權)에서의 현대판 간신의 아부성 발언(發言)에 대해 알아보고 공부하면서 현세(現世)에 살아가는 우리가 귀감(龜鑑)으로 삼아 본받아야 하거나, 반대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智慧)로 고쳐 나가야할 다음과 같은 몇가지 역사적 교훈(歷史的 敎訓)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 째, 30여 년 동안 많은 임금아래서 권좌(權座)에 머물렀던 한명회가 만년(晩年)에 ’속된 세상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가에서 갈매기와 친하게 지난다’는 뜻에서 자기 호(號)를 따 압구정(狎鷗亭)이란 이름을 짓고,

         관직(官職)을 떠난 뒤 언제라도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기 위해 서울 가까운 곳에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그 유래부터가 권력 지향적(勸力 指向的)인 탓인지, 압구정 터가 있던 곳은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권력층과 상류층의 주거지가 되었으며 주소지를 이곳에 둔 것만으로도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수준을 헤아리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습니다.

       

         또 당시 압구정의 운치(韻致)와 그 화려(華麗)함이 명(明)나라에 까지 소문이나 중국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압구정에서 연회(宴會)를 열어 줄 것을 간청할 정도였다 하니, 실제로 외래객(外來客)과의 흥청

         는 연회가 많이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현세(現世)의 압구정동 일대는 ’로데오 거리’니 ’오렌지 족’이니 하며 외래 소비문

         화(外來 消費文化)가 흥청대는 곳이 되었습니다.

 


         두 임금을 받들어 세우고, 네개의 공신(功臣)을 겸하고, 두 임금의 장인(丈人)이었으며, 최고의 벼슬을

         여러번 살았던 천하(天下)의 한명회였지만 민심(民心)은 그의 위선(僞善)에 우둔(愚鈍)하지 않아 그의

         화려한 정자(亭子)에는 낙서가 끊이지 않았으니, 갈매기와 친하게 지난다는 압구정(狎驅亭)의 현판(懸

         板)아래에는 가까이 지난다는 뜻의 압(狎)자를 누를 압(押)자로 바꿔 압구정(押驅亭)이라 쓴 낙서가

         있었다 합니다.

 


         이렇듯 한명회의 압구정은 이미 자취마저 없어지고 현대 아파트 72동 옆의 작은 표석(標石)으로 그 유허

         (遺墟)임을 가리키고 있을 따름이지만, 지금도 갈매기를 벗하며 철새들을 맞이하고 있는 정자가 있으니

         세종조의 명상(名相) 황희(黃喜)정승이 은퇴하여 갈매기와 벗하며 머물던 파주의 임진강변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입니다.

 


         반구정의 반(伴), 압구정의 압(狎)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둘 다 ’벗한다’라는 뜻입니다. 두 정자는

         다같이 노재상(老宰相)이 은퇴하여 한가로이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餘生)을 보내던 정자입니다만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정자의 주인인 황희 정승과 한명회의 일생만큼이나 극적(劇的)인 대조(對照)를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 째, 압구정의 유래가 권력 지향적이며 중국 사신들과 연회를 벌이며 흥청대던 곳이고 지금의 압구정동이

         상류층의 주거지(住居地)이며 외래 소비문화가 흥청대는 곳이라면, 살곶이 다리가 놓여있는 살곶이 벌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庶民)들의 삶터이고 말(馬)문화(文化)와 깊은 관계(關係)를 갖고있다 하겠습니다.

 


         살곶이 벌(뚝섬 벌)은 사방 3,4십리의 넓은 평야(平野)로 풍부(豊富)한 맑은 물과 양질(良質)의 목초지대

         (牧草地帶)로서 조선 초기부터 말들을 많이 길렀습니다. 또한 뚝섬은 임금님의 사냥터이고 군대(軍隊)를

         열무(閱武)하는 연병장(練兵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임금님이 무예(武藝)를 점검하기 위하여 자주 거둥하였는데 그때마다 임금의 행차(行次)를 알리

         는 독기(纛旗: 쇠꼬리나 꿩꼬리로 장식한 장군기)를 세웠으며, 이곳 지형이 삼면(三面) 모두 강으로 둘러

         싸인 섬과 비슷하다하여 한자 독도(纛島)라 하였는데 발음(發音)이 뚝섬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뚝섬이란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도 말과 관련된 지명(地名)이 일부 남아 있는데, 과거’마장(馬場)안벌’ 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안평과

         마장동(馬場洞) 등이 대표적 지명입니다. 또한 현재 한양대학교가 자리한 산기슭에는 말의 안녕(安寧)을

         비는 마조단(馬祖壇)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는데서 비롯된 지명이며, 제주도 같은 곳에

         서 어렵사리 말을 한양으로 운반해오면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 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내졌고

         숫말은 마장동의 말 목장에서 길러 졌습니다. 한때는 마장동 일대에 서울에서 제일 큰 가축시장(家畜市

         場)과 도축장(屠畜場)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적 마차(馬車)인 버스 터미널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장안평에는 현대 마차인 자동차(自動車) 매매시장(賣買市場)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1989년 과천(果川)으로 옮긴 후 이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體育施設)이 들어서

         이웃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뚝섬에는 경마장(競馬場)이 있었습니다. 더욱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옛날 말들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던 살곶이 벌(살곶이 다리 옆 둔치)에 ’살곶이 자동차극장’

         이 생겨 성업(盛業) 중이라고 합니다.

 


셋 째, 한명회가 두 딸을 왕비(王妃)로 들여 두 임금의 장인(丈人)이 되어 평생(平生)동안 권세(權勢)를 누렸지

         만, 부인(婦人)들에게는 엄(嚴)하였다 합니다. 한명회가 지나친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조선시대 부인들이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유교적(儒敎的) 전통(傳統)을 잘 지켜나가고 희생적(犧牲的)

         인 내조(內助)를 하였기에 이웃에게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칭송(稱誦)을 듣고 조선왕조

        (朝鮮王朝)가 500년이 넘게 사직(社稷)을 보전(保全)하는데 일조(一助)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넷 째, "지나친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격언(格言)이 있습니다. 세상에 지나칠 과(過)자가 앞에 붙어 좋은

         뜻의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과욕(過慾), 과음(過飮), 과식(過食), 과색(過色), 과체중(過體重), 과부하

         (過負荷), 과소비(過消費), 과다노출(過多露出), 과보호(過保護), 과잉충성(過剩忠誠) -- 등등.

 


         이중에서도 과잉충성(過剩忠誠)은 알랑방귀와 더불어 예나 지금이나, 양(洋)의 동서東西), 조직(組織)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간신(奸臣)들에 의해 저질러져 나라를 망(亡)하게 하고 조직(組織)을 와해

         (瓦解)시키는 것입니다.

 


         "방귀 자라 X된다"고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 행차(行次)를 수행하다가 대통령이 방귀를 터뜨리자 "각하

         시원 하시겠습니다."라고 알랑방귀를 뀌어댄 간신들의 과잉충성(過剩忠誠)으로 인(因)하여 몇년 후

         (1960년) 3.15 부정선거(不正選擧)가 이루어 지고 4.19 학생혁명(學生革命)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下野)를 하고 독재정권(獨裁政權)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간신들과 알랑방귀쟁이들의 행태(行態)를 살펴보면 임금이나 대통령, 크고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늙거나, 어리거나, 어리석거나, 병들었을 때와 독재권력(獨裁勸力)을 휘두를 때 어김없이 나타나 왕(王)

         이나 대통령(大統領), 조직(組織)의 우두머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바른 사람들을 모함(謀陷)하고 인(人)

         의 장막(帳幕)을쳐 접근을 막고, 오직 한 사람에게만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말과 행위(行爲)를 일삼으며

         자기가 우두머리라도 된 양 호가호위(狐假虎威) 합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이 일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멀쩡한 제도(制度)를 뜯어고치려 하고, 악법(惡法)을

         만들어 댑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두머리를 돕는다고 별 짓을 다 하지만 결국은 우두머리를 망가뜨리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다섯째, 독도(纛島)의 발음(發音)이 독섬이 되었다가 다시 뚝섬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듯이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조선시대(朝鮮時代)를 통(通)하여 우리들 특히 서민(庶民)들

           에게는 정겨운 고유(固有)의 지명(地名)이 있었습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 일본놈들이 자기들의 식민통치(植民統治)에 편리하도록 우리들의 아름다운

          고유지명(固有地名)들을 뜻도 안 맞는 한문(漢文) 말로 고쳐놓은 것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강(漢江)을 거슬러 올라가며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불렀던 고유의 지명을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포-삼개나루, 옥수동-두뭇개, 금호동-무수막, 자양동-자마장, 광장동-광나루, 풍납동-바람드리,

          암사동-바우절 ---- 등등

 




         

      살곶이 벌 인근(隣近)에 살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압구정과 살곶이 다리를 아쿠장살쿠지 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압구정 위치

 

 

 


 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

 

이미지 출처 - 인터넷

 

 

 

 

가야금 산조       원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