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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2, 3, 4, 5, 6, 7, 8 종합편

低山 2018. 8. 30. 22:00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2, 3, 4, 5, 6, 7, 8 종합편

 

  2005년 4월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 편 1

 

 

징기스칸의 후예(後裔)이며 대원(大元, 몽골)의 황제(皇帝) 쿠빌라이가 남송(南宋)의 정복(征服)에 한창 분망(奔忙)할 때, 고려출신(高麗出身)인 신하(臣下) 조이(趙彛)가 “고려의 동방해상(東方海上)에 일본(日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남송과 교역(交易)하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인만큼 남송을 고립(孤立)시키려면 일본을 초유(招諭)하여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진언(進言)함에 지원(至元) 2년(1265년) 초유사(招諭使)를 뽑아 일본에 정중(鄭重)한 국서(國書)를 보내 통교(通交)를 요구(要求)했습니다.

 

그 국서가 비록 정중한 형식(形式)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그 골자(骨子)는 물론 일본에 대해서 복속(服屬)을 촉구(促求)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거부(拒否)하면 무력행사(武力行事)도 불사(不辭)하겠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暗示)하는 협박(脅迫)의 내용(內容)이었습니다. 6차에 걸친 초유사(招諭使)의 파견(派遣)에도 일본막부(日本幕府)가 말을 듣지 않자, 1273년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는 일본정벌(日本征伐)을 결심(決心)하고, 고려에 동참(同參)과 협조(協助)를 요구(要求)하기에 이릅니다. 고려의 元宗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쿠빌라이의 “원과 고려가 서로 통호(通好)하지 않는 것을 어찌 일가(一家)의 이치(理致)라 하겠는가, 병(兵)을 사용(使用)하는데 이르러서는 것이 누구에게 좋으랴. 왕(王)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협박에 가까운 요청(要請)을 아니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여몽원정연합군(麗蒙遠征聯合軍)의 지휘부는 몽골 측에서 흔도, 홍다구, 유복형및 고려의 장수(將帥) 김방경(金方慶) 등 네명으로 구성(構成)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원정의 전략(戰略)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5천명의 자국병(自國兵)을 동원(動員)했습니다. 여기에 1만 5천명에 달하는 고려군(高麗軍)과 합하여 4만 명에 가까병력(兵力)이었습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합포(合浦, 마산)에 도착(到着), 그 일대에 집결(集結)했습니다.

 

드디어 몽골의 장수 홍다구(洪茶丘)가 고려의 공장(工匠), 역부(役夫) 3만여 명을 무자비(無慈悲)하게 닥달하여 건조(建造)군함(軍艦) 900 척도 합포에 집결했습니다. 모든 준비(準備)가 완료(完了)된 것입니다. 출정(出征)의 시기(時機)가 7월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출정을 바로 앞둔 6월 중순(中旬)에 원종 (元宗)이 재위(在位) 15년만에 타계(他界)했습니다. 그래서 世子(忠烈王)의 결혼(신는 쿠빌라이의 딸 薺國大長公主)과 즉위식(卽位式)까지 출정이 연기(延期)되었습니다.

 

제 1차 여몽연합원정군이 합포를 출항(出港)한 것은 1274년 10월 3일 이었습니다.


 

    (정순태님의 여몽연합군의 제 1차 일본 원정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2 -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 편 2

 

 

여몽연합함대(麗蒙聯合艦隊)는 출항(出港) 이틀 후인 1274년 10월 5일(음력) 오후 4시경, 대마도(對馬島) 아랫 섬의 사스우라 포구(지금의 코모다)에 상륙(上陸)하였습니다. 대마도의 중심지(中心地)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 섬의 중앙산지(中央山地)를 가운데둔 반대쪽 북서해안(北西海岸)에 위치(位置)해 있는 한적(閑寂)한 어촌(漁村)이었습니다.

 

앞 바다를 뒤덮은 900여 척의 이국선(異國船)의 출현(出現)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村民)들은 이즈하라에 있는 국부관(國府館, 관청)으로 달려가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을 고(告)했습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武士)였는데, 즉각(卽刻) 부하무사(部下武士) 80여 기(騎)를 이끌고 말을 달려 이틑날인 10월 6일 새벽녘에 가스우라에 도착(到着)하여 오전 6시 경 통역(通譯)을 시켜 해안에 상륙해 있던 몽골군 지휘관(指揮官)에게 그 래의(來意, 상륙한 이유)를 물었지만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화살부터 메뚜기떼처럼 날리며 맹공(猛攻)을 가했습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소호 스케구니 이하(以下) 일본 무사들은 2시간 만에 전멸(全滅)했습니다.

 

대마도를 정복(征服)한 여몽연합군은 이즈하라 항(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休息)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攻擊目標)인 이키시마(壹岐島)를 향하여 진발(進發)합니다. 대마도를 초토화(焦土化)시키고 출항한 여몽연합군의 함대(艦隊)가 이키시마 북부해안 가쓰모토(勝本) 포구(浦口)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 14일 오후 4시 경 이었습니다. 대선(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여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촌민들은 이 사실(事實)을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 항)에 있는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히 고니다.

 

성주(城主)는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이라는 무사였습니다. 다이라노 케이류우는 일족(一族)의 무사 100 騎를 이끌고 가쓰모토를 향하여 출진(出陣)하던 도중(途中)에 연합군의 대부대(大部隊)와 조우(遭遇)하게 됐습니다. 다이라노 케이류우는 고래(古來)의 전장의식(戰場儀式)에 따라 휘하의(麾下)의 무사 1 騎를 내보내 명적(鳴鏑, 소리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개전(開戰)의 신호(信號)를 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自身)의 이름과 가계(家系), 전적(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적진을 향하여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고대(古代)의 개전의식(開戰儀式)은 아예 무시(無視)하고 종(鍾)과 징을 요란히 치면서 그 일본무사를 에워싸고 무참(無慘)히 죽여 버렸습니다. 고대소설(古代小說)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나 볼 수 있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전쟁방식(戰爭方式)으로 자기들끼리 소규모(小規模) 전투(戰鬪)를 일삼던 우물 안 개구리 일본무사들이 세상(世上)이 많이 변한 것을 깨닫는 순간(瞬間)이었습니다. 400여명의 연합군은 단궁(短弓)에 독(毒)화살을 매겨 난사(亂射)하고 창을 휘두르며 육박해 갔습니다. 일본군(日本軍)도 응전(應戰)하여 격전(激戰)이 벌어졌습니다.

 

해가 지자 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信號)로 총퇴각(總退却)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과 화살로 상처를 입은 일본군의 피해는 컸습니다. 남은 병력(兵力)은 겨우 20여 騎에 불과(不過)했습니다. 그들은 히츠메 城에 들어가 하룻밤을 밝혔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15일 ,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 성을 포위(包圍), 맹공(猛攻)을 가했습니다. 얼마안가 일본군은 전멸(全滅)하고 이키시마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陷落)되었습니다.      

     

 

     (정순태님의 여몽연합군의 제 1차 일본 원정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3 -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 편 3

 

 

이키시마를 초토화(焦土化)시킨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은 이어 왜구(倭寇)의 본거(本據地)인 나가사끼 현(縣) 마쓰우라(松浦) 군(郡)의 다카시마를 습격(襲擊)했습니다. 다카시마에는 마쓰우라도우(松浦黨)이라고 불리우는 악명(惡名)높은 왜구(倭寇, 중국과 고려 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놈 해적)들 수 백명이 작당(作黨)을 하고 있었습니다.

 

1274년 10월 17일,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에 상륙(上陸)하였습니다. 수 백명의 왜구의무리와 규슈의 고케닌(御家人, 가마쿠라 막부 직속무사)들은 나름대로 분전(奮戰)했지만, 일본(日本) 기마무사(騎馬武士)의 개인전법(個人戰法)에 대한 연합군의 집단전법(集團戰法)의 위력(偉力) 앞에 압도(壓倒)당하여 전멸(全滅)하고 말았습니다.

 

여몽연합군은 여세(餘勢)를 몰아 가마쿠라 막부(幕府)의 본거지인 대재부(大宰府)의 공략(攻略)을 위해 하카다 만(灣)으로 진격(進擊)해 들어갔습니다. 10월 19일, 연합군의 일부병력(一部兵力)이 하카다 만의 서부해안(西部海岸)에 상륙하여 교두보(橋頭堡)를 확보(確保)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0일, 여명(黎明)과 함께 3개 방면(方面)에서 연합군의 대대적(大大的)인 상륙작전(上陸作戰)이 전개(展開)되었습니다.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총사령관(總司令官) 즈네쓰케는 규슈영내(營內)의 슈코(守護, 지방장관), 지토우(地頭, 고을원),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무사)들에게 총동원령(總動員令)을 내렸습니다. 총 5375 기(騎)의 병력(兵力)이 하카다 만에 집결(集結)했습니다.

 

여몽연합군과 일본군과의 전투(戰鬪)가 시작(始作)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집단전법과 신무기(新武器)의 위력 앞에 무참(無慘)히 패퇴(敗退)했습니다. 전투는 새벽부터 일몰(日沒)까지 계속(繼續)되었습니다. 연합군은 하카다 만에 상륙하면 곧장 대재부(大宰部)로 진격(進擊)해서 이를 점령(占領)계획(計劃)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연합군은 퇴각(退却)하는 일본군을 더 이상 (追擊)하지 않고 함대(艦隊)로 되돌아가 배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이것은 지리(地理)에 익숙치 않아 일본군의 야습(夜襲)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 고 10월 20일의 전투에서 주력병기(主力兵器)인 단궁(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의 사령관(司令官) 김방경(金方慶 )은 하카다 교두보에서 야영(野營)한 뒤에 다음날 일본군과 결전(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主張)한 반면(反面), 몽골 측 총사령관(總司令官) 흔도와 우부원수(右副元首) 홍다구는 배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부(拒否)했습니다.

 

 

이렇듯 지휘부의 견해(見解)가 엇갈린 상황(狀況)에서 귀함(歸艦)한 여몽연합군은 10월 20일 심야(深夜)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다 만으로 몰아닥친 대폭풍우(大暴風雨)로 궤멸적(潰滅的) 타격(打擊)을 입고 말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함선(艦船) 중 200여 척이 침몰(沈沒)하고 수많은 병력(兵力)이 하카다 만 앞바다에 수장(水葬)되었습니다.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撤收)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연현상(自然現象)으로서 일본의 신(神)들이 진노(震怒)하여 신풍(神風, 가미가제)을 일으킨 것도, 용신(龍神)의 비늘을 건드려 파도(波濤)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최고지휘관(最高指揮官)의 판단(判斷) 잘못이 자초(自招)한 결과(結果)였습니다. 만약 연합군이 10월 20일 중에 하카다 만에 교두보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對備)한 물자와 무기를 상륙시켜 숙영(宿營)했더라면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항복(降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후 전개역사(歷史)의 향방(向方)은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정순태님의 여몽연합군의 제 1차 일본 원정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4 -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 편 4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의 1차 일본침공(日本侵攻)이 예상(豫想)치 못한 태풍(颱風)으로 인하여 실패(失敗)로 끝나자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훗날을 기약(期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선(優先) 국내문제(國內問題)인 남송(南宋)의 정벌(征伐)에 전력(全力)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結果) 1279년 2월 6일, 몽골군에 의해 남송(南宋)은 멸망(滅亡)하기에 이릅니다. 쿠빌라이는 미루어 두었던 일본정벌을 남송군(南宋軍)을 활용(活用)하여 전개(展開)하려고 작정합니다. 그리고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高麗)에도 똑 같은 규모(規模)의 전함(戰艦)과 군대(軍隊)의 참전(參戰)을 강요(强要)합니다.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2차 일본침공에 필요(必要)한 전함 900여 척의 신조(新造)와 군량(軍糧)의 확보(確保)를 고려에게 부담(負擔)시키는 한편, 충렬왕 6년(1279)에는 동정(東征)의 전담기구(專擔機構)를 합포(合浦, 오늘날의 마산)에 개설(開設)하니 이것이 바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입니다.

 

충렬왕 7년(1281) 5월 마침내 여몽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2차 동정(東征)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때의 진용(陳容)을 살펴보면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장수는 흔도, 홍다구였고 고려군 장수는 김방경이었습니다. 동로군(東路軍)이라 이름지어진 여몽연합군은 4만명의 규모(規模)이고, 송장(宋將, 남송의 장군)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은 10만명으로 실로 방대(尨大)한 규모의 병력(兵力)이었습니다. 5월 3일 합포를 떠난 동로군(東路軍)은 1차 원정(遠征) 때와같이 대마도와 이키시마(壹岐島)를 초토화(焦土化) 시킨후 북규슈(北九州) 해안(海岸)에 도착(到着)하여 공격(攻擊)을 개시(開始)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뒤늦게 중국 해안에서 출항한 강남군(江南軍)이 합세하여 더욱 적극적(積極的)으로 일본군(日本軍)을 밀어붙여 멸망(滅亡)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뜻하지 않은 천재(天災)의 변(變)이 일어났습니다. 즉 윤(閏) 7월 1일에 북규슈 일대를 갑자기 휘몰아친 태풍으로 인하여 동로군(東路軍)은 막대(莫大)한 손실(損失)을 입고 다시 합포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전함이 튼튼해서 일부(一部)만 파손(破損)되어 남은 병력이 돌아올 수 있었지만, 튼튼치 못한강남군(江南軍)의 3,500여척 전함(戰艦)은 10만여 명의 병력(兵力)과 함께 북규슈(北九州) 앞 바다에 수장(水葬)되고 말았습니다. [高麗史]에는 이 때의 상황(狀況)을 "6월 임신(壬申, 6일)에 김방경 등이 왜군(倭軍)과 싸워 적군 300여 급을 참수(斬首)하였다. 범문호가 전함 3,500척과 만군(蠻軍) 십여 만을 거느리고 합전(合戰)하였으나 마침 태풍이 일어 만군은 모두 익사(溺死)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젼 다큐멘타리 필름과 인터넷 상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5 - 진주만 기습 편

 

 

 1941년 12월 7일(일요일) 07시 50분, 미국령(美國領) 하와이 제도(諸島) 중(中) 오하우 섬의 남안(南岸)에 위치(位置) 한 진주만(眞珠灣)에 일본(日本)의 항공모함(航空母艦)에서 날아온 비행기(飛行機)와 바다 밑으로 침투(浸透)한 잠수함(潛水艦)에 의한 예고(豫告)없는 대대적(大大的)이고 전격적(電擊的)인 기습작전(奇襲作戰)이 감행(敢行)되었습니다.

 

이 기습으로 호놀룰루 서(西)쪽 10Km 거리(距離)에 위치하며 하와이 원주민(原住民)의 말로 진주(眞珠)가 많이 산다는 바다라는 뜻의 ‘와이모이’, 영어(英語)로 Pearl Harbor( 진주만, 眞珠灣)는 병사(兵士)들이 채 잠에서 깨기도 전(前)에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고 막대(莫大)한 피해(被害)와 인명(人命) 손실(損失)을 입었습니다.  일본의 예고 없는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美國國民)을 일치단결(一致團結)시켰고, 다음 날인 12월 8일 미국의회(美國議會)는 일본에 대(對)해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습니다. 이에 반대(反對)한 의원(議員)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로서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에서 연합군(聯合軍)에 가담(加擔)하는 직접적(直接的)인 계기(契機)가 된 것입니다. 중국(中國)에서 아무런 소득(所得)도 없이 오랜 전쟁(戰爭)에 싫증이 난 일본(日本)은 유럽의 전쟁상황(戰爭商況)을 이용(利用)해서 동(東)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植民地)들을 강탈(强奪)하기로 결심(決心)하게 되는데, 네델란드, 불란서, 영국 등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인도 차이나, 말레이 반도(半島)에는 일본의 산업경제(産業經濟)와 군사력 증진(軍事力 增進)에 필요(必要)한 주석, 고무, 석유 등 자원(資源)이 풍부(豊富)했습니다. 일본은 이곳들을 침략(侵略)하기 전(前)에 잠재적(潛在的)인 방해세력(妨害勢力), 미국을 먼저 무력화(無力化) 시키기 위(爲)하여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軍事施設)을 기습공격(奇襲攻擊)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日本) 연합함대(聯合艦隊) 사령관(司令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주축(主軸)으로 하는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야마모토 계획(計劃)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航空母艦) 기동타격대(機動打擊隊)를 미국 정찰대(偵察隊)에 포착(捕捉)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北)쪽 440km에 이동(移動)시켰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日曜日) 미명(未明) 360여대의 일본 비행기(飛行機)가 진주만에 위치(位置)한 미국의 거대(巨大)한 해군기지(海軍基地)를 향(向)하여 날아 올랐습니다.

 

진주만은 완전(完全)히 기습(奇襲)을 당(當)했고, 정박(碇泊) 중(中)이던 전함(戰艦) 8척(隻)이 모두 공격(攻擊)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크고 작은 함정(艦艇)이 파손(破損)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航空機)가 파괴(破壞)되었고, 2,000명이 넘는 장병(將兵)이 죽었으며, 부상자(負傷者)도 1,000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攻擊)은 한 가지 중요(重要)한 점에서 실패(失敗)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航空母艦) 세 척은먼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被害)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 미국 해군(海軍)의 초기(初期) 방위체계(防衛體系)에서 핵심(核心)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6 - 미드웨이 해전 편

 

 

 1941년 12월 7일(일요일) 미명(未明)을 기한 예고(豫告)없는 일본(日本)의 진주만(眞珠灣) 기습공격(奇襲攻擊)은 미국 측(美國 側)에 막대(莫大)한 피해(被害)를 입혀 언뜻 보기에는 성공(成功)한 듯 보였으나, 이것은 잠자는 사자(獅子)를 건드려 화(禍)를 자초(自招)한 것이나 다름없어, 이 역사적 사건(歷史的 事件)을 계기(契機)로 일본제국(日本帝國)은 멸망(滅亡)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일본(日本軍)이 최대(最大)의 목표(目標)로 삼았던 미국의 항공모함(航空母艦) 세 척(隻)은 각자(各自)에게 부여(附與)된 작전임무(作戰任務)를 수행(修行)하느라 먼 바다에 나가있어 전혀 피해(被害)를 입지 않을 수 있었고, 1, 2次에 걸친 공격(攻擊)을 받아 철저(徹底)히 파괴(破壞)되었던 전함(戰艦)과 항공기(航空機), 비행장(飛行場) 등과는 달리 일본의 마무리 3次 공격이 없었던 작전실수(作戰失手) 덕분(德分)에 진주만 외곽(外廓)에 산재(散在)해 있던 선박수리창(船舶修理倉)과 유류저장(油類貯藏)탱크, 군수품창고(軍需品倉庫) 등은 아무런 피해(被害)를 입지 않고 건재(健在)하여 그 후 미국이 전력(戰力)을 비축(備蓄)하여 6個月 만에 미드웨이 해전(海戰)을 승리(勝利)로 이끌고, 이어지는 크고 작은 전투(戰鬪)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약(略) 6개월간은 일본이 여세(餘勢)를 몰아 전세(戰勢)를 유리(有利)하게 장악(掌握)할 수 있었습니다. 5월의 산호해(珊瑚海) 해전(海戰)에서도 일본이 간발(間髮)의 우세승(優勢勝)을 거두었습니다. 일본은 미국 본토(本土) 진출(進出)의 다음 목표(目標)로 미드웨이 제도(諸島)를 삼았습니다. 북(北)쪽의 알루샨 열도(列島)를 공격(攻擊)하는 척 양동작전(陽動作戰)을 벌이며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습니다. 이미 일본 전함(戰艦) 간에 오가는 전신암호(電信暗號)를 해독(解讀)하여 공격목표(攻擊目標)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미군(美軍)은 만반(萬般)의 대비태세(對備態勢)를 갖추고 일본군(日本軍)을 맞아 싸웠습니다. 사상최대(史上最大)의 해전(海戰)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측(兩側)의 항공모함(航空母艦)은 일본이 4척, 미국이 3척이었습니다. 1942년 6월 4일 이른 아침, 나구모 중장(中將)이 지휘(指揮)하는 일본 함대에서 먼저 미드위이 섬을 향해 전투기(戰鬪機)를 발진(發進)시켰습니다. 미군도 이에 질세라 일본 항공모함을 향해 전투기(戰鬪機)와 폭격기(爆擊機)를 날렸습니다. 하루 종일 승패(勝敗)를 가름할 수 없는 격렬(激烈)한 해전((海戰)과 공중전(空中戰)이 벌어졌습니다. 승패는 오후 늦게 판가름 났습니다. 나구모 중장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지휘로 실기(失機)한 일본군의 패배(敗北)가 확연(確然)히 드러났습니다. 나구모 중장이 타고 있던 항공모함 아까기 號에 세 발의 폭탄(爆彈)이 명중(命中)하여 큰 폭발음(爆發音)과 함께 화염(火焰)에 휩싸여 침몰(沈沒)했습니다. 나구모 중장은 보트로 가까스로 탈출(脫出)하여 순양함(巡洋艦)에 옮겨 탔습니다. 총사령관 야마모토 제독(提督)은 패배를 인정(認定)하고 6월 5일 02시 55분, 함대(艦隊)를 미드웨이 해역(海域)에서 후퇴(後退)하라는 명령(命令)을 내립니다.

 

본은 이 작전(作戰)에서 항모 4척, 순양함 한 척과 조종사(操縱士) 100여명을 포함(包含)해 3,500명이 넘는 전사자(戰死者)를 냈고 322대의 항공기(航空機)를 잃었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항모 1척, 구축함 1척, 항공기 180대를 잃었고, 307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海戰) 이후(以後)  일본군은 더 이상 전쟁의 주도권(主導權)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기서 입은 피해(被害)를 도저히 보충(補充)하고 전력(戰力)을 만회(挽回)할 수 없었으나, 반면(反面)에 미국은 수십배(數十倍)에 이르는 전력의 보충을 하게 되어 태평양 전쟁(太平洋 戰爭)이 끝날 때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유지(維持)하게 됩니다.

 

   

             (텔레비젼 다큐 필름과 네이버 오픈사전을 참조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7  - 카이텐(回天) 편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日本海軍)에 의(依)한 진주만(眞珠灣) 기습(奇襲)이 있은 지 6個月만인 1942년 6월 4일, al드웨이 해전(海戰)에서 승리(勝利)한 미군(美軍)은 여세(餘勢)를 몰아 크고 작은 투(戰鬪)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일본군이 점령(占領)하고 있던 태평양(太平洋) 상(上)의 여러 섬들을 탈환(奪還)하게 됩니다. 반면(反面), 일본군은 수세(守勢)에 몰려 옥쇄작전(玉碎作戰)에도 불구하고 전세(戰勢)를 만회(挽回)하기란 불가능(不可能) 한 일이었습니다. 정상적(正常的)인 작전(作戰)으로는 전쟁(戰爭)을 계속(繼續)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切感)한 대본영(大本營) 수뇌부(首腦部)에서는 마지막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특단(特端)의 조치(措置)를 강구(講究)하게 되었으니, 인간(人間)을 병기(兵器)로 사용(使用)하는 자살특공대(自殺特攻隊)가 그것입니다.

 

자살특공대는 하늘에서부터 시작(始作)되었습니다. 13世紀,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1, 2次 침공(侵攻)에서 일본을 멸망(滅亡) 일보직전(一步直前)에서 구(救)해 주었다고 일본인(日本人)들이 신봉(信奉)하는 태풍(颱風)인 가미가제(神風)를 이름 붙여 조종사(操縱士)가 인간폭탄(人間爆彈)이 되어 적함(敵艦)에 대로 돌진(突進)하는 가미가제 특공대(神風 特攻隊)가 창설(創設)되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어느 정도(程度)의 전과(戰果)를 올리고 미군에게 공포심(恐怖心)을 주자, 이에 고무(鼓舞)된 일해군(日海軍)서는 인간(人間)이 어뢰(魚雷)를 조종(操縱)해서 적함(敵艦)에 돌진(突進)하여 파괴 격침(破壞 擊沈)시키는 특공병기(特功兵器) 카이텐(回天)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結局) 제작 (製作)하여 실전(實戰)에 사용(使用)하게 됩니다.

 

영어 명(英語 名)으로는 Turning of the Heaven인 카이텐(回天)은 독구가와(德川) 막부(幕府)의 군함(軍艦) 카이텐(回天) 號의 이름에서 비롯했습니다. 카이텐(回天)은 일본해군(日本海軍)이 당시(當時) 세계최고(世界最高)의 성능(性能)을 지니고 있다고 기존(旣存)의 93식(式) 어뢰(魚雷)를 개량(? 改良)하여 제작(製作)하였는바, 한 사람의 조종수(操縱手)가 타는 1人用과 두 사람이 타는 2人用이있었습니다. 두 종류 다  일단(一旦) 임무(任務)를 부여(附與) 받고 조종수가 타게 되면 그 순간(瞬間)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탈출(脫出)이 불가능(不可能)하도록 했습니다. 전쟁 말기(戰爭 末期)인 1944년 후반(後半)부터 총(總) 100여回에 걸쳐 발사(發射)되었으나 그 성공률(成功率)은 지원병(志願兵)이 아닌 강제징집(强制徵集)으로 인한 정신적(精神的) 사기문제(士氣問題)와 출격시(出擊時) 너무 부족(不足)한 연료공급(燃料供給)으로 극(極)히 저조(低調)하여 (美艦)을 격침(擊沈)시킨 사례(事例)는 단 두 번 뿐이었고 이것조차 대형함정(大形艦艇)이 아닌 조선(油槽船) USS Missessinewa 號와 구축함(驅逐艦) USS Underhill 號 뿐이었습니다.

 

                  

           

        (텔레비젼 다큐 필름과 네이버 오픈백과를 참조 작성하였습니다.)

                                                                             

 

 

 

 


카이텐(回天) 

 

 

이미지 출처 - 인터넷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8 - 가미가제(神風) 편


 

1941년 12월 7일(일요일) 미명(未明)을 기한 일본의 예고(豫告)없는 진주만 기습(眞珠灣 奇襲)으로 시작(始作)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戰鬪)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전투기(戰鬪機) 등 각종(各種) 항공기(航空機)를 조종(操縱)하는 조종(操縱士)의 역할(役割)이 가장 컸습니다. 조종사의 중요성(重要性)을 인식(認識)하고 인명(人命)을 중시(重視)한 미군측(美軍側)은 전쟁초기(戰爭初期)부터 격추(擊墜)되거나 불시착(不時着)한 조종사들의 구출작전(救出作戰)에 심혈(心血)을 기울였고 또한 많은 조종사들을 구출하여 그들이 다시 조종간(操縱桿)을 잡고 전을 수행(修行)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飛行機)는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은 시 살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우수(優秀)한 조종사를 양성(養成)하는 데는 오랜 시과 막대(莫大)한 비용(費用)이 들어가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인 것입니다.

 

이런 불을 보듯 빤한 사실(事實)을 깨닫지 못했는지 일본군측(日本軍側)은 개전초기(開戰初期) 승리(勝利)하고 있을 때부터 전투기(戰鬪機)가 피폭(被爆)되면 조종사 자신(自身)은 애기(愛機)와 함께 산화(散華)하는 것을 영광(榮光)이나 순국(殉國)로 알았고 군당국(軍當局)에서도 구출작전(救出作戰)은 아예 염두(念頭)에 두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942년 6월 4일의 미드웨이 해전(海戰)에서의 패배(敗北)로 인(因)하여 4 척(隻)의 항공모함(航空母艦)과 많은 전함(戰艦), 수백 대의 항공기(航空機)를 잃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피해(被害)는 수백 명의 우수(優秀)한 조종사들을

 

잃은 것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敗)한 후 계속 후퇴(後退)를 하던 일본군(日本軍) 수뇌부(首腦部)에서는 정상적(正常的)인 작전(作戰)으로는 도저히 미군(美軍)과 대적(對敵)할 수 없다고 판단(判斷)하고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특단(特段)의 조치(措置)를 강구(講究)하던 중 제로 전투기(戰鬪機)에 폭탄(爆彈) 500Kg을 적재(積載)하고 조종사가 탄 채 적함(敵艦)에 그대로 돌진(突進)하는 가미가제(神風) 특공대(特攻隊)를 창설(創設)하게 됩니다. 가미가제(神風)란 1274년과 1281년 2次에 걸친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침공(侵攻)을 격퇴(擊退)시켜주었다고 일본인(日本人)들이 신봉(信奉)하는 태풍(颱風)을 이르는 말입니다.

 

미군의 필리핀 상륙작전(上陸作戰)에 때 맞춰 최초(最初)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출격했습니다. 17~24세의 지원자(支援者)로 이루어진 초기(初期)의 가미가제는 미군측(美軍側)의 방어대응(防禦對應)의 미숙(未熟)과 비교적(比較的) 우수(優秀)한 조종사의 자질(資質)로 인(因)하여 정(正確)하게 미함(美艦)에 충돌(衝突)하여 격침(擊沈)시키는 등 바라던 전과(戰果)를 얻기도 했습니다. 가미가제는 미군들에게 정신적(精神的)으로 극심(極甚)한 공포감(恐怖感)을 불러일으키게 하기도 했습니다. 미군들이 특(特)히 두려워 한 것은 가미가제 전투기가 군함(軍艦)의 굴뚝으로 그대로 돌진(突進)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굴뚝 돌진으로 많은 피해(被害)를 본 미국(美國)에서는 곧 굴뚝을 ㄱ 자(字) 형태(形態)로 구부러지게 개조(改造)하였습니다.

 

이렇듯  창설되어 활동(活動)을 시작한 초기에는 어느 정도 바라던 전과(戰果)를 올리고 미군들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가미가제 특공대는 갈수록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미군의 방어대응이 보다 강력(强力)해 졌고, 우수한 조종사들의 전사(戰死)로 인해 단시간(短時間)의 비행교육(飛行敎育)을 받은 청소년(靑小年)들의 용기(勇氣) 부족과 비행미숙(飛行未熟) 때문이었습니다. 충돌하려는 순간(瞬間) 겁을 집어먹고 발화(發火) 휴즈를 작동(作動)치 않아 불발(不發)시키거나 그것도 못하여 전투함(戰鬪艦) 바로 밖에서 바다로 돌진하는 조종사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전쟁이 진행(進行)되는 동안 2,300여 회의 출격(出擊)과 5,000여 명의 젊은 조종사들이 동원(動員)되었습니다.  

 

 

       (텔레비젼 다큐 필름과 네이버 오픈백과를 참조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2, 3, 4, 5, 6, 7, 8  종합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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