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희귀동물 이야기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

低山 2020. 1. 4. 09:51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


                                                   2004. 4. 1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1950년대 중반(中盤), 저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보니 국민학교 다닐 때와 확실히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명찰(이름표)이 달린 교복을 입고 학교 뺏지가 부착된 교모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기르던 머리는 빡빡 깍아 기계충과 땜통이 있던 아이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 싫어 했습니다. 다음으로 걸어 다니던 통학길이 멀어져 어린 나이에 만원버스와 전차를 타고 교통지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엄마나 누나 손 붙들고 마음대로 드나들던 영화관에 못가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보고싶어 못 견디겠는 영화를 보려고 사복(私服)을 입고 극장에 잠입했다가 여러 학교 훈육선생님들로 이루어진 합동단속반에 걸려 이름을 적히는 날에는 말 그대로 ’끽’(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모양으로 표현)이었습니다, 실제로 각 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정학사유(停學事由)에서 극장출입이 으뜸을 차지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중, 고등학생(요즘 말로 중, 고딩)들의 문화욕구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주고 좋은 영화는 학생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교육적 차원에서 문교당국에서는 학교 별로 영화의 단체관람을 허용했습니다. 단체관람은 개봉관(開封館)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개봉관으로는 광화문의 국제극장, 종로3가의 단성사, 퇴계로에 새로 생긴 대한극장---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대한극장은 1956년 미국 폭스社의 설계로 새로 지어진 객석 1900여席의 대형극장으로서 초대형 70mm 영사기와 최첨단 음향시설을 두루 갖춘 당시로서는 꿈의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개관(開館) 후 대한극장에서는 ’남 태평양’, ’사운드 어브 뮤직’. ’벤허’ 등  수 많은 명화를 상영하여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한극장은 최근 들어 극장의 형태가 영화만을 상영하는 대형극장 위주에서 쇼핑과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멀티플렉스館으로 전환하는 추세에 따라,「징기스칸(The Conqueror)」상영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막대한 공사비을 투입하여 2002년에 많은 상영관을 갖춘 초대형 영화관으로 새롭게 개관했습니다.

 

 중, 고등학교에서 일요일 오전에 영화 단체관람이 결정되면 며칠 전에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책상을 두두리며 좋아했고, 마치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듯이 손 꼽아 기다리다가 관람일이 되면 오징어, 땅콩에 사이다를 마시며 킥킥대고 영화를 보다가 크라이막스 때나 주인공이 적에게 이기는 장면에서는 박수를 쳤습니다. 그 무렵부터 콜라와 팝콘(서양 걍냉이 튀김)도 선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5, 60년대 중, 고딩들은 이렇게하여 당대를 풍미(風味)하던 수십여 편의 명화(名畵)에 접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정서발달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었으며,  아련한 향수와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감동을 받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오늘은 同名의 소설을 영화화하여 히트한  두 편의 작품, ’해저 2만리’와 ’백경(白鯨)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드리고 두 작품에서 출현하는 대왕오징어와 향유고래에 관하여 공부해 볼까 합니다.

 

      *                          *                          *                          *                          *

 

 먼저, ’백경(白鯨)’에 대하여 4, 5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를 본 감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때는 19세기 중엽(中葉) 대서양에 면한 아메리카 대륙 어느 산록마을에 ’이슈멜’이라는 청년이 살았는데, 그가 계곡과 강을 따라 돈을 벌러 바다로 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4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의 기억에 "이슈멜이라고 합니다"하면서 젊은 주인공이 개나리 봇짐을 메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첫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바닷가 고래잡이 마을에 도착한 이슈멜은 여인숙에 짐을 풀고 여인숙 술집에서 고래잡이 선원들을 만나 고래사냥에 합류하게 됩니다. 날을 잡아 포경선(捕鯨船)은 출항하고 얼마 후, 고래 한 마리를 발견한 그들은 세 척의 보트를 내려 작살과 창살을 고래의 등에 꽂아 잡아서 배에 끌어 올려 고래기름을 짜서 선창(船倉)에 보관합니다. 포경선의 선장(그레고리 펙 粉)이 보통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가 젊었을 때 백경(白鯨, 흰고래)를 사냥하다가 왼쪽다리를 고래에게 먹혔기에 고래 아가리뼈로 만든 의족(義足)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항해의 목적도 온 세상 바다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백경을 찾아 복수하려는 일념에서 였습니다.

 

 어느날, 돛대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이슈멜이 수백마리의 고래 떼를 발견합니다. 신바람이 난 고래잡이들은 고래를 쉴새없이 잡아 올리는데, 다른 포경선이 나타나 "백경을 며칠 전에 보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선장은 고래사냥을 멈추고 백경을 찾아 나설 것을 명합니다. 고래잡이들의 반발도 잠깐 선장의 이글거리는 복수심과 불타는 카리스마에 이끌려 고래잡이 배는 선수(船首)를 돌려 백경을 찾아 빠르게 물쌀을 갈랐습니다.

 

 드디어, 전세계 대양(大洋)을 누비며 찿아 헤메던 백경과 마주쳤습니다. 고래 아가리뼈 의족의 선장이 자기의 잃어버린 왼쪽다리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보트를 내려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세 隻의 보트에 나누어 탄 고래잡이들은 온힘을 다해 백경을 쫓았고, 작살잡이들은 작살을, 항해사들은 창살을 수도 없이 백경의 등짝에 힘껏 던져 쑤셔 박았습니다. 흰 눈 덮인 山만한 크기의 백경에게 보트의 노는 ’이쑤시개’에 지나지 않았고, 작살과 창살은 기운을 돋구는 ’주사바늘’과 ’수지침’과 다름 없었습니다. 백경은 수수(水球)선수가 수구 공 가지고 놀 듯 보트 3척을 날려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성이 안 찬 백경은 수백톤의 고래잡이 배로 어뢰처럼 돌진하여 침몰시켰습니다. 선장이하 수십명의 선원이 익사하고 단 한 사람 ’이슈멜’만이 다른 포경선에 의하여 구조되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습니다.

 

 ’모비 딕’이라 이름지어진 백경(白鯨)이 바로 고래의 일종 향유(香油)고래입니다.  

 

 다음으로, ’해저 이만리’를 감상한 소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경(白鯨)’이 바다 위(海上)에서 푸른 파도를 헤치며 고래와 싸우는 고래잡이들의 사투(死鬪)를 그린 작품이라면, 조용한 바다 밑에서 어둠을 가르며 대모험을 펼치는 공상과학의 세계를 선보인 SF영화의 효시(嚆矢)가 ’해저 이만리’라 할 수 있습니다.

 

 때는 19세기 후반(後半), 세계 도처의 바다에서 고래보다도 크고 무지하게 빠른 괴물이 출몰하여 여러 척(隻)의 배를 침몰시키는 해난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자, 프랑스 박물관에 근무하는 어느 박사 등 몇명이 괴물을 찾아 나서 마침내 먼 바다에서 만나게 됩니다.

 

 괴물이란 다름아닌 자연보호주의자 네모 선장이 이끄는 잠수함 ’노틸러스 號’였습니다. 노틸러스 호로 안내된 이들은 해저에서 대 모험을 펼치게 되는데, 한창 호기심 많던 중, 고딩 들은 ’백경(白鯨)’을 감상할 때와는 또 다른 감흥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율을 느끼며 미지의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전력(電力)을 동력원(動力源)으로하는 노틸러스 號의 선내(船內) 생활과 해산물 요리, 잠수복을 입고 잠수함 밖으로 나가 해저평원을 산책을 하며 모험을 하는 등 흥미진진한 장면이 많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해저 이만리’ 신(scene)의 압권(壓卷)은 거대한 오징어가 시커먼 먹물을 품으며 나타나 열 개의 다리로 노틸러스 호를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주인공 (커크다그라스 粉)이 선체(船體)를 휘감은 오징어의 다리를 도끼로 내리쳐 자르는 등 사투를 벌여 가까스로 물리친 것으로 기억됩니다.

 

 영화 ’해저 이만리’에서 잠수함 노틸러스 호를 공격한 오징어가 바로 대왕오징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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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에 대하여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향유고래 [香油고래, sperm whale]      

 

 몸길이 수컷 15∼18m, 암컷 11∼13m, 몸무게 수컷 57t, 암컷 43.5t이다. 향고래·말향고래라고도 한다. 대형의 이빨고래류로서, 이빨고래류 중에서 가장 크다. 몸빛깔은 회색이나 배쪽에 옅은색의 얼룩점이 있는 개체가 많다. 몸빛깔은 나이와 더불어 백화(白化)하는 경향이 있다. 머리는 성장에 따라 커져서 몸길이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등지느러미는 없지만, 파도 모양의 피부돌기가 있다. 아래턱은 통나무처럼 가늘고 길며, 한쪽에 20∼28개의 큰 이빨이 있지만, 위턱의 이빨은 퇴화되어 눈에 띄지 않는다. 가슴지느러미는 몸에 비해 대단히 작다.

 

 잠수력이 뛰어나 1시간이나 잠수할 때가 있으며, 또 수심 2,200m나 되는 해저의 케이불에 걸린 예도 있다. 주로 오징어를 먹지만 때로 물고기도 먹는다. 임신기간은 15∼16개월이며, 3∼5년마다 한배에 1마리를 낳는다. 거대한 머리에서 품질 좋은 기름을 얻을 수 있고, 대장에 덩어리 형태로 생기는 병적인 생성물은 용연향(龍延香)이라 하는데, 안정제로 쓰이는 값비싼 향료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지의 바다에 분포한다.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대왕오징어

 

 수심 3백~1천m의 심해에 사는 대왕오징어가 살아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 단지 죽어서 바닷가에 밀려왔거나, 그물에 걸려 죽었거나, 향유고래의 위 속에 들어 있는 잔해를 보았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대왕오징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더욱 신비에 싸여 있다. 우리는 심해에 사는 대왕오징어의 생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대왕오징어보다 멸종된 공룡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대왕오징어는 무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크며, 눈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커 지름이 30~40㎝나 된다. 여태까지 발견된 가장 큰 대왕오징어는 1800년대 말 죽어서 뉴질랜드 해안으로 밀려온 것으로, 몸길이 18m에 몸무게는 1t이 넘었다. 199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 해역에서 15m짜리 대왕오징어가 그물에 걸린 채 죽어서 올라온 적이 있다.

 

 눈은 배구공만큼 크고, 입은 야구공만한 것이 단단한 앵무새 부리처럼 생겼고, 다리는 사람의 허벅지만큼 굵었다. 이 대왕오징어로 오징어 순대를 만든다면, 굵기가 트럭 바퀴만 할 것이다. 해양생물학자들은 이보다 더 큰 대왕오징어도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네이버 오픈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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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앞에서 1950년대 후반(後半)과 60년대 초반(初盤)에 걸쳐 보낸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특히 단체관람했던 수 많은 명화(名畵) 중 ’백경(白鯨)’과 ’해저 이 만리’를 감상한 소감을 말씀드리고 등장하는 두 동물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4, 50년 전을 회상하며 학창시절의 추억담과 두 동물을 공부하며 얻은 여러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 저는 6. 25 전쟁이 휴전되기 전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학교를 다니게 해 주신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고아도 많았고, 가난하여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같은 또래의 청소년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 이용하던 시내버스 차장(車掌)들만해도 학교를 다녔으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형님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시내에서 청량리를 거쳐 중량교가 종점인 버스 노선이 있었는데, 차장 형들은 손님을 끌고 안내를 위하여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멘트(ment)를 반복적으로 하다보니 기운도 떨어지고 하여 나중에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나요."

차장 형들은 승객들을 거칠게 다루고, 승객들과 싸움을 한다는 이유로 얼마 후에는 차장 누나들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가난한 집안살림 때문에 입하나 던다고 고향집에서 부모 곁을 떠나 남의 가게 점원으로, 공장 직공으로, 밥 술이나 먹는 집 가정부로 전업(轉傳)하였습니다. 이 분들 중에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훌륭하게 되신 분들도 많고, 많은 분들이 산업역군으로서 국가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 학력의 차이, 지위의 높고 낮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사람이 되고 안됨’이라고.  

 

둘,  5, 60년대의 중, 고딩들은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이 결정되어 관람일 며칠 전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이 중대사실을 발표하시는 순간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작약(歡呼雀躍)했습니다. 그날부터는 잠도 잘 안오고 영화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마치 소풍 갈 날만 기다리는 국민학생처럼.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소풍(逍風)을 원족(遠足)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조금 먼 거리의 절이나 능(陵)에 걸어서 가 싸가지고 간 음식을 둘러앉아 맛있게 먹고, 보물찾기 등 놀이와 노래, 율동(유희라고 했슴) 등 여흥을 즐기다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초딩시절 운동회와 더불어 가장 추억에 남는 대행사였습니다.

 

원족을 가는 날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엄마가 정성껏 싸주신 김밥과 과자와 사이다 등을 넣은 리꾸사꾸(작은 배낭)를 둘러메고 신바람이 나서 집을 나섰습니다. 극성스런 엄마들은 평소 아끼던 비로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양산을 바쳐 쓰고 따라 나섰습니다. 선생님 도시락도 싸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촌지(寸志)봉투도 들고,’치맛바람’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나 봅니다.

 

아이들 원족에 엄마들만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모난 궤짝을 둘러맨 아이스케키 장수, 조그만 손수레에 아이스크림 제조통을 매단 아이스크림 장수, 빙수와 냉차 장수, 솜사탕 장수, 또뽑기 장수, 요지경 아저씨, 등 요즘으로 보면 불량식품 보급부대가 열(列)을 맞추어 걸어 가는 학생들과 엄마들 본대(本隊)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학교를 다녔으면 중, 고등학생이었을 아이스케키 장수 형들은 녹기 전에 빨리 팔기 위하여 이렇게 반복해서 웨쳐댔습니다. "아이스 깨끼, 어름과자 !" "아이스 깨끼, 어름과자 !". 자꾸 들으면 이렇게 들렸습니다. "아이 새끼, 어른 과자 !". 빨갛고 노란 색소로 물들인 고깔 콘에다가 현장에서 직접 만든 서걱서걱한 아이스 크림을 주걱으로 퍼 담아 파는 아이스 크림 장수 아저씨의 허스키한 호객(呼客) 목소리 "아이스 쿠리~!". ------------- 그 때를 아십니까?

 

셋, 그레고리 펙, 커크 다그라스, 버트랑 카스타. 챨톤 헤스톤, 율브린너, 마론 브란도, 케리 쿠퍼, 죤 웨인, 안소니 퀸, 오손 웰스, 리차드 위드마크, 록 허드슨, 로버트 테일러,제임스 딘, 진 시몬스, 오드리 햅번, 에리자베스 테일러, 마리린 먼로, 라나 타나, 비비안 리, 데보라 카, 소피아 로렌,크리스티네 카푸만, 지나로로 부리지다, 스잔 헤이워드 등 등 헤아릴 수 없이 명멸하던 기라성같은 미남미녀 은막(銀幕)의 스타들이 이제는 늙고 기운없8, 90 노인이 되었거나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습니다.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고 울고 웃던 5, 60년대의 중,고딩들도지금은 5, 60대의 ’꼰대’가 되어 무대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콘베아 벨트’에 실린 화물처럼 어느누구도 종착역을 향하여 가는 인생여정에서 예외이거나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부영화(西部映畵)에서 인디언들이 부족원로들을 평소에 극진히 모시고, 위기상황에서 원로들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자문을 구하는 장면을 종종 보았습니다. 이들에게서 배울 것은 배워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로 삼아야겠습니다.

 

넷,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바다이고 육지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山 (8,848m)보다 마리아나 해구(海溝, 11,038m)가 더 깊습니다. 무인 심해 잠수정(深海 潛水艇)의 발달로 마리아나 해구까지 도달하여 조사해 보니 여기에도 갑각류(甲殼類 )등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다 밑으로 10m 내려갈 때마다 기압은 1기압씩 높아집니다. 수심(水深)이 1000m라면 100기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수복을 착용한 잠수부이거나 과학자가 탄 유인 잠수정이 대왕오징어가 서식하는 심해(深海)에서 살아있는 대왕오징어를 발견하거나 관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대왕오징어와 향유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향유고래의 등에 특수제작된 비디오 카메라를 부착하여 그들이 수심 3,000m의 바다속으로 들어가 활동하고 대왕오징어를 포식하는 장면을 찍는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그 필름을 보았는데, 향유고래들이 어느 깊이에 도달하여서는 모두들 머리를 바다 밑으로 향하고 잠을 자는 것같이 한동안 꼼짝도 안하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런 모습을 향유고래가 보이는 것은 잠을 자는게 아니라 아마도 향유고래가 운기조식(運氣調息)하듯 큰 머리통 속에 꽉 찬 기름을 이용하여 부력(浮力)을 조절하고, 기압의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섯, 소설이나 영화에서 향유고래와 대왕오징어는 과장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우리 인류에게 흥미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의 노고로 이제는 어느정도 두 동물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정리해 보면, 깊은 바다 속에 대왕오징어가 살고 있지만 큰 배를 공격할 정도로 크지는 않고 머리에서 다리 끝까지 10m~20m정도의 크기이며, 향유고래가 수심3,000m 정도까지 잠수하였다가 다시 바다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반면 대왕오징어는 자기가 서식하는 깊이의 범위를 벗어나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능력을 고루 갖춘 포유류(哺乳類)인 향유고래에게 두족류(頭足類)인 대왕오징어는 적수(敵手)가 되지 못하고 향유고래에게 잡혀 먹히고 맙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문화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파됩니다. 향유고래에게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비축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精神)을 배워야할 때입니다.

 

 

                                                                                     -  끝 -

 

 

 
 
 
 
 

 





 
 
 
 
 
 
 
 
 

 

 
 
 
 
 
 
 
 
 
 

 

 이미지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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