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활동, 성지순례

혈색순교, 백색순교와 녹색순교

低山 2018. 2. 21. 07:08


 혈색순교, 백색순교와 녹색순교

 

                                                                     2004. 4. 18

 순교(殉敎)는 넓은 뜻으로는 주의, 사상을 위해서 죽는 경우를 말하며 주로 그리스도교나 이스람교와 같은 유일신교 세계에서 발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순교를 경신덕(敬神德)으로 여겨 특별히 중요 사항으로서 순교의 분명한 뜻을 부여하고 있으며,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성(聖) 스테파노가 첫 순교자로 일컬어 지고 있습니다. (사도7:54~60)

 

 우리나라 가톨릭 교도로서는 1785년(정조9)에 정약전 3형제 등과 함께 예배보다 발각된 김범우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 죽음으로서 사실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등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아 세계 종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신앙선조들이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신부이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순조21)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그의 가문은 몰락 양반가문으로서 증 조부인 김진우 때부터 탄생된지 얼마 안되는 천주교회에 입문하였습니다.

 

 그 후 1836년 부활절(4월 5일)을 전후하여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36년 6월 7일 김대건은 먼저 선발되어 있던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하여 파리 외방선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세명 중 최방제는 교육을 받던 중 열병으로 죽고 1845년 김대건이 먼저 입국하였다가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건너가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 품을 받았습니다. 다시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다가 1846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 형으로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 품에 오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같이 "각종 고문이나 참수, 교수형, 화형, 돌로 쳐 죽이기와 맹수에게 물려 죽이기등 처형의 수단"에 의해 순교하신 것을 ’혈색순교(血色殉敎)’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이신 최양업(토마스)신부는 1821년 충청도 홍주의 누곡(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 새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순교자이며 성인인 최경환(프란치스코)와 역시 순교자인 이성래(마리아)입니다.

 1836년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습니다.

 

 그 해 12월 3일에 귀국하여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 부터 임지를 부여 받고 안성 ’배티성지’ 이웃의 동골에 거처를 정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5개 도의 산간 벽지에 흩어져 있는 4,000여명의 신자들과 100여개의 공소를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면서도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교리서의 한글 번역과 천주가사의 저술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 오는 중 과로로 말미암아 문경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현재 배티 성지를 중심으로 많은 교우들이 하루 빨리 신부님께서 성인 품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가운데 신부님의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같이 박해시대에 피를 흘리는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언제라도 자기 피를 흘릴 혈색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백색순교(白色殉敎)’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이신 정규하(아오스딩) 신부는 1863년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양리에서 정기화(마태오)와 한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1896년 4월 26일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를 졸업하고 뮈텔주교의 주례로 강도영(마르코), 강성삼(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 성당(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서품 후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 성당’에 르메르 신부에 이어 제 2대 신부로 임명되어 1943년 10월 23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천주고 신앙촌인 풍수원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서울,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이 박해의 칼날을 피해 숨어들어 정착한 곳입니다.

 

 그 후 무려 80여년 동안을 목자없이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일운채 믿음을 지켜오다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1888년 풍수원 본당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정규하 신부가 1896년 제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정규하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착공하여 1907년에 준공되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풍수원 성당은 서울 약현 성당과 비슷한 크기의 연와조 건물로 우리나라 네 번째의 성당 건물입니다.

 

 정규하 신부는 이곳을 거점으로 사목활동을 한 결과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 되었고 그곳으로부터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본당 등이 분당되었습니다.

 

 정규하 신부님과 같이 박해시대는 지나갔지만 "넓은 대지에 깊게 뿌리 내리고 우뚝선 상록수(常綠樹)" 처럼 천수(天壽)를 다하여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를 봉헌하는 것을 ’녹색순교(綠色殉敎)’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어 오묘하시게도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셨고, 첫 번째 신부님이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 두 번째 신부님이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 세 번째 신부님이신 정규하(아오스딩) 신부님께  차례로 ’혈색순교’, ’ 백색순교’, ’녹색순교’ 모범을 보이게 하셨습니다.

 

 우리 천주 교우들은 세 분 신부님과 다른 여러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의 순교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이다."라는 각오로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다 바쳐 ’나눔의 순교’,  ’봉사의 순교’, ’사랑의 순교’ 해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미지 출처 - 인터넷


 성가 61번~♬

 성가 61번~♬


자주 가는 까페 - 남한산성자연사랑 ☜ 클릭

  카테고리 중 '低山 님의 공간'이 있습니다.

'低山님 아름다운 새'에도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