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활동, 성지순례

평신도 순교성인 정하상 바오로

低山 2017. 7. 15. 20:50


평신도 순교성인 정하상 바오로

 

                                                                                                       2004. 4. 18

 

 저는 4년전(2000년) 10월 27일(금요일)에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가 중림동 성당 순교자 기념관에서 실시한 올해의 평신도상(像) 정하상(바오로) 성인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형제님 세명이 참석 했습니다.

 

 심포지엄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제1 발표에 서종태(한국 교회사 연구소 책임 연구원)  박사의 ’정하상의 생애와 교회활동’, 제2 발표로 한건(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의 ’정하상의 신학 사상’이라는 주제로 수준 높고 진지한 연구 발표가 있었습니다. 잠시 휴식 후에 원재연(서울대학교 강사)박사와 차기진(양업 교회사연구소장)박사의 두 분 발표자의 발표에 대한 논평이 있었고, 이에 대한 두 분 발표자의 반론등 네 분의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또한 참석자 들에게는 미리 질문서가 나뉘어져 의문점을 적어 올린데 대한 발표자들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중림동 성당은 서울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서소문 밖 약현입니다.) 약현 성당은 명동 성당 보다 먼저(1892년) 건립되었는데 수년전(1994) 괴 청년의 방화로 소실되어 20억원을 들여 다시 건립하여 2000년 9월에 옛 모습 그대로 완공 되었습니다. 그 옆에 순교자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전의 서소문은 도성 내의 시신을 운반하던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작은 성문 이었습니다. 이 서소문 밖에 사형장이 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 입니다. 새남터(절두산 성지)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사제들이 순교하셨고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정하상(바오로)님을 비롯한 평신도들이 순교하셨습니다. 후에 서소문 형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약현)에 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유서깊은 중림동 성당에서 올해의 평신도상 정하상(바오로) 심포지엄에 참석하게되어 숙연한 마음을 금할길 없었으며 더 많은 신자들이 참석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참석자들은 대부분 5,60대의 남자 교우들이었습니다.)도 느꼈습니다.

 

 두 분 발표자와 두 분 토론자의 발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하면 정하상 바오로

(1795~1839)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님의 조카입니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님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1801년 7세때 부친과 친형 정철상님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누이동생 정정혜님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 부락(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큰댁으로 낙향 하였습니다. 20세때 단신 상경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고 한국 천주교를 위한 초석으로 폭 넓은 활동을 펴게되었습니다.

 

 

 정하상(바오로)님의 업적을 살펴 보면                                                 

 

 

첫 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 이었습니다.                     

 

둘 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서 평신도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습니다.

 

셋 째, 그는 앙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기위해 선택된 한사람

       이었지만 1839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앙베르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

       하게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넷 째, 그는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 재상서’로써 박해자들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습니다.

 

다섯 째로 정하상(바오로)님은 생명의 극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서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여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하였습니다.

 

 

 정하상(바오로)님은 기해박해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오르셨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위해 방한 중이신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 되었습니다.

 

 

         *                   *                   *                     *

 

 

 정하상(바오로) 성인을 비롯한 순교 성인들께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실 때의 의연한 모습과 겪으신 고통을 지금 우리가 조금이라도 체험하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서소문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작은 성문으로 주로 도성내의 시신을 운반하던 문입니다. 성안에서 서소문을 나서면 지금의 서울역 광장쪽으로 약간 경사진 비탈길 이었습니다. 비탈길을 내려가면 비교적 넓은 사형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신앙 선조들을 처형하던 방법은 소가 끄는 우차에 예수님이 못박히셨던 십자가와 거의 같은 크기의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앞 발판위에 순교자를 서게한 후 머리카락과 양팔을 십자가에 묶고 발판을 치운 후 갑자기 소를 몰아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마구 달려 내려갔습니다. 온몸의 체중이 머리카락과 양팔에만 실린 신앙선조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형장에 다다르면 십자가에서 풀려 내려져 회자수(망나니)에 의해 참수 되었습니다.

 

 정하상(바오로) 성인은 처형장으로 나아 가시는 동안 만면에 미소를 띄우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내달릴 때도 신음 소리 하나 안내시고 묵상에 잠겨 벌써 이 세상 사물을 잊어버린 것같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참수 되시어 오로지 천주님 만을 위한 이승에서의 고귀한 삶을 마치시고 순교하셨습니다.

 

 

 

- 끝 -

  

 
  

 

 

103위 순교성인 상


 



자주 가는 까페 - 남한산성자연사랑 ☜ 클릭

  카테고리 중 '低山 님의 공간'이 있습니다.

'低山님의 아름다운 새'에도 올리고 있습니다.



 성가 61번~♬

 성가 6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