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시도지교(市道之交)와 아유구용(阿諛苟容) 그리고 문경지교(刎頸之交)

低山 2020. 2. 12. 19:10



 시도지교(市道之交)와 아유구용(阿諛苟容) 그리고 문경지교(刎頸之交)




 시도지교(市道之交)와 아유구용(阿諛苟容)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명장(名將 )염파(廉頗)에게는 식객(食客)이 많았습니다. 전쟁(戰爭)에 출정(出征)하였다 하면 승리(勝利)하고 돌아오곤 하여 혜문왕(惠文王)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땅과 재물(財物)이 넉넉해서 전국(全國)에서 식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염파 자신(自身)도 식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가끔씩 술자리를 베풀고 같이 즐겼습니다.


 그런데 왕의 절대적(絶對的)인 신임(信任)을 받던 그가 진(秦)나라와의 일전(一戰)에서 왕의 오해(誤解)를 받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식객들은 염파(廉頗)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얼마 후 염파가 재등용(再登用)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뿔뿔이 떠났던 식객들이 다시 하나 둘 모여 들었습니다.


 식객(食客)들이 먼저보다 더 많아져 3,000명이 넘었습니다 식객(食客)들은 전(前)처럼 염파(廉頗)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며 아유구용(阿諛苟容,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며 구차스런 짓을 하는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염파(廉頗)는 역겨운 생각이 들어 식객(食客)들을 쫒아내려 하였습니다.


 이때 어느 식객(食客)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화내실 일이 아닙니다. 무릇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利益)이 되는 곳에 붙게되어 있습니다. 군주(君主)에게 권세(權勢)가 있을 때는 군주를 따르고, 권세가 떨어지면 군주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確實)한 일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염파(廉頗)는 탄식(歎息)하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도지교(市道之交, 시장 장삿군들의 이해득실에 따른 진실치 못한 사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출처]  <史記 廉頗藺相如 列傳>




 문경지교(刎頸之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臣下) 목현(穆賢)의 식객(食客 )중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뻔 했던 천하명옥(天下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태로 찾아 가지고 돌아온 공(功)으로 일약(一躍) 상대부(上大夫)에 임명(任命)되었습니다.


 3년 후(B.C. 280), 소양왕(昭襄王)이 혜문왕(惠文王)을 말로 욕보이려는 것을 인상여(藺相如)가 가로 막고 나서서 오히려 소문왕에게 망신(亡身)을 주었습니다. 그 공로(功勞)로 인상여는 종일품(從一品) 상경(上卿)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인상여의 지위(地位)는 조(趙)나라의 유명(有名)한 명장(名將)염파(廉頗)보다 높아진 것입니다.


 염파(廉頗)는 분개(憤慨)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빼앗고 들에서 적(敵)을 무찔러 공(功)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藺相如)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亡身)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藺相如)는 염파(廉頗)를 피했습니다. 그는 병(病)을 핑계대고 조정(朝廷)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같은 인상여(藺相如)의 비겁한 행동(行動)에 실망(失望)한 한 부하(部下)가 작별(作別)인사를 왔습니다.


 인상여(藺相如)는 떠나는 것을 만류(挽留)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염파(廉頗)장군과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되는가?” 그 부하(部下)가 對答했습니다. “네 물론 소양왕(昭襄王)이 더 무섭지요.”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나는 소양왕(昭襄王)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臣下)들 앞에서 혼내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强國인 진(秦)나라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危機)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廉頗)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刑杖)을 짊어지고 인상여(藺相如)를 찾아가 섬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미욱해서 대감(大監)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어서 저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염파는 진심(眞心)으로 사죄(謝罪)했습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 친구를 위해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를 나누며 오래도록 같이 살았습니다.


 

     

          [출처]  <史記 廉頗藺相如 列傳>             (네이버 백과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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