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활동, 성지순례

문경 여우목 성지

低山 2014. 1. 26. 06:53

 

 
 
 
 
문경 여우목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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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문경 여우목 성지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
 

여우목[狐項里]은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徐光修, 1715~1786)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이 충북 청풍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박경화(관명 도항, 朴甫祿, 1757~1827,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朴士儀, 일명 사심, 1792~1839,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1839년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 회장이었던 이윤일 요한은 외교인들에게 전교하여 30여 명을 입교시킴으로써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1866년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 가을에 이윤일 요한의 아들인 이 시몬과 예천 건학의 전 하비에르가 예천 포졸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으며, 이듬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박 사도 요한 가정 등 일부 신자들은 충북 보은과 산촌으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충주를 거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10월에 문경 포졸들이 이곳에 들이닥쳐 당시 회장인 이윤일을 비롯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그와 부인, 큰 며느리(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와 아들 하나, 그 외 많은 신자들이 압송되어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교회의 두목이라 해서 한실 공소 김 회장과 함께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때 나이 45세였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徐翼淳, ?~1868, 요한), 서태순(徐泰淳, ?~1868, 요한 또는 베드로)은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고,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서 백지사 치명을 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가문
서상돈(1851∼1913)이 조선시대와 구한말에 걸친 신앙 자유기에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 또 그는 지물상과 포목상을 통해 이룩한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 사회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상돈의 고조부인 서광수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천주교 신앙이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서상돈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784년 전후이다. 상돈의 고조부이며 대구 달성 서씨 20세 손인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듬해 천주교의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서광수는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 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후 상돈의 조부 치보(서광수의 손자)는 경북 문경 여우목으로 옮겨와, 성 이윤일 가정과 함께 포교활동을 했다. 현재 여우목에는 치보와 아들 인순의 묘가 성지 내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상돈은 병인박해로 대구 감옥에 갇혀 있는 삼촌 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는 삼촌을 보고, 이후 거상(巨商)이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다. 또 봄, 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자선, 구휼 사업에 힘쓴 것도 이 일이 있은 후부터라고 한다.
서상돈은 1895년 대구 읍내에 임시 성 요셉 성당을 지을 때 집 매입부터 수리까지 1,000여 달러 이상을 봉헌했으며, 현 계산동 성당 터에 기와집 십자 성당을 건축할 때인 1897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립되고 드망즈 안세화 주교가 부임하자 상돈은 주교관 부지로 현재 중구 남산동 교구청 자리 1만여 평을 교회에 헌납했다. 당시 상돈의 사촌 동생인 동정녀 서 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던 남산동의 기와집을 비워 드망즈 주교의 임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상돈의 증손자로 손꼽히는 성서학자인 서인석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자신이 성서학 연구에 평생을 몸담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순교자와 집안 어른들이 보여준 성서 사랑에 연유한다고 밝혔다. 서상돈의 직계 후손 외에도 천주교 시조라 할 수 있는 광수의 후손 중에도 성직자와 수도자가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서상돈의 직계 후손으로는 공석. 인석 신부와 준석 수녀가 있다. 또 서상돈의 삼촌인 인순, 명순, 태순의 후손들로는 정도, 형석, 태석 신부, 그리고 외손으로도 신부 1명, 수도자 3명이 있다. 서상돈의 증조부 유오의 형제 유덕, 유도의 후손 중에는 친손으로 정혁 신부와 성직자 3명. 수도자 1명이, 외손으로 오윤수 신부 외 성직자 1명, 수도자 10명이 배출됐다.
여우목 성지가 조성된 데는 서상돈의 증손자 공석 신부를 비롯한 후손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버려지다시피 했던 묘소를 찾아 지난 99년부터 성지로 조성할 1,300여 평의 토지를 헌금으로 구입하고 서상돈의 삼촌인 순교자 인순과 인순의 아버지 치보가 묻혀 있는 묘소를 이장하는 등 성지 조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박해를 피해 방방곡곡을 떠돌다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 선조 순교자들. 잡초만 무성한 채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거룩한 순교 정신이 100여 년이 넘게 신앙을 이어 온 후손들의 헌신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 순교자

◆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교우들이 신앙적인 형제의식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서인순(徐隣淳) 시몬 (1808∼1868)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의 증손자로서 대대로 온 집안과 대소가가 모두 열심한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는 1808년 5월 17일(음)에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그는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부친 서치보와 모친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모시고 동생들(명순, 철순, 익순, 태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서 살았다.
1840년 9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4명의 동생들과 함께 풍기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경신박해 때인 1860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들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헌에게 잡혀 대구감영의 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868년 4월 29일(음)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되었고 후에 부친의 묘소가 있는 이곳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으며,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부친 서치보 요셉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 베로니카 할머니의 신앙 증거
병인박해 때 이윤일 성인 등 3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의 일이다. 중평리 여우목 밑의 마을(현재 개신교 교회가 들어서 있는 곳)에 살던 베로니카란 80대 할머니도 함께 포졸들한테 붙잡혀 가게 됐다. 고령의 베로니카 할머니는 다리를 절면서 잘 걷지를 못했다.
자연히 끌려가는 대열에서 자꾸 처지자 포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랐다. “왜 할머니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텐데 절뚝거리며 따라 가느냐?”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베로니카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에게 되물었다. “살아계신 천주님을 어떻게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증거했다.
노쇠한 베로니카 할머니와 포승줄을 끌어당기는 포졸들과 실랑이가 세 번째 오가다 우두머리 되는 자가 칼을 빼들었다. “그래, 죽는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베로니카 할머니는 끌려가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했다. 베로니카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 ‘여기는 중평리, 여우목 성지 1.5km’라는 표지석(사진)이 세워져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모든 교우들이 자신을 참회하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성가 6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