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흥청망청의 유래 - 연산군

低山 2020. 8. 13. 08:27

 

흥청망청의 유래 - 연산군

 

                                               2005년 9월 2일

 

조선 제10대의 王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에 대하여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휘 융.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또 국민일보 논설위원 박연호님 께서는 1999년 11월 26일자 칼럼에 ’벌써부터 흥청망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 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 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따라서 이 말에는 그 유래가 시사하듯이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는 비아냥과 경고가 함께 들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연말을 앞둔 서울 시내가 벌써부터 흥청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20세기 마지막 송년회니 새 밀레니엄 환영회니 하면서 유명호텔,고급 룸살롱 등의 예약이 넘쳐나고 있다.IMF체제라고 차분하고 조촐하게 보냈던 지난해 연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가 IMF체제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경기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도 아니다.갈수록 사회의 그늘진 곳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그럼에도 건망증 환자들처럼 이렇게 나대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후략(後略)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연산군의 패륜과 방탕을 보다 못한 늙은 환관(내시) 김처선이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늙은 저는 지금까지 네 분의 임금을 섬겼으나 다른 임금들은 어느 누구도 전하처럼 음란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연산군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김처선의 가슴을 향해 쏘았습니다.

 

김처선은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늙고 천한 제가 무엇이 두려워 임금님께 바른 말을 못 하겠습니까?" 연산군은 김치선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올 때마다 다리와 팔을 하나씩 잘랐습니다. 숨이 끊어지자 시체를 호랑이 우리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은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잔학하기 이를데 없는 나 이지만

 

천한 내시가 임금에게 덤빌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끄럽고 통분한 마음

 

깨끗한 청량수에 씻어도 지워지지 않으리."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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