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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프로레스링 시리즈 6 - 알리와 이노끼 편

低山 2019. 12. 9. 00:04



옛날 프로레스링 시리즈 6 - 알리와 이노끼 편

 

 

 

안토니오 이노끼(猪木)는 1943년 2월 20일 일본 요꼬하마시(市) 에서 태어 났습니다. 1957년에 온가족이 브라질로 이민을 갔습니다. 키가 크고 운동에 소질과 취미가 있던 이노끼는 소년시절 부터 육상경기에 열중했습니다. 특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1959년, 브라질에 원정경기 중이던 역도산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어 프로레스링에 입문하게 됩니다. 다시 일본으로 오게된 이노끼는 피나는 훈련과 연습을 거쳐 1960년 9월 30일 대동체육관에서 데뷰전을 갖게 됩니다. 상대는 선배선수인 오오끼 긴따로(大木 金太郞)였습니다. 이 선수가 바로 우리의 김일 선수였던 것입니다.

 

 그러구 보면 김일 선수는 이노끼 선수의 동문 선배인 셈입니다. 이노끼에게는 또 한사람의 대 선배 선수가 있으니 자이안트 바바(馬場) 선수 였습니다. 이노끼 선수는 키가 190Cm로 작은 키가 아니지만 몸무게는 !00Kg남짓의 날렵한 체구로 레스링 선수치고는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선배 김일 선수와 자이언트 바바 선수가 일찌기 미국 원정을 통하여 기라성같은 많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를 소화해 냈고 명성을 높여간데 비하여 후배인 이노끼는 그에 못 미치는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이벤트성 쇼 비지니스 감각이 풍부했습니다.

 

 1963년 12월 15일 스승 역도산이 비명에 횡사를 하자, 그 소식은 수제자 세 사람에게는 청천벽력(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것이었습니다. 김일 선수와 자이안트 바바 선수는 미국 원정 중이었고 이노끼 선수만이 역도산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밀입국자였던 김일 선수는 그 소식을 듣고도 후견인 역도산이 없기에 일본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미국에 머물다가 2년 후 김일 선수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자이안트 바바 선수와 이노끼가 역도산 사후(死後)의 일본 프로레스링계를 짊어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이안트 바바 선수와 이노끼 선수는 성격이나, 경기스타일, 추구하는 노선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이안트 바바 선수는 1939년생으로 신장 2m 10Cm의 타고난 거인 입니다. 처음에는 야구를 해 프로야구 거인팀의 투수였습니다. 바바 역시 역도산의 눈에 띄어 프로레스링에 입문하게 된 것입니다. 생긴대로 우직한 성격에 정통을 추구했습니다. 세 선수 중 덩치나 실력이나 외국에서의 지명도에서 단연 앞섰었습니다. 

 

 그가 상대선수를 링 줄로 밀었다가 반동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다리를 번쩍 들어 크고 넙적한 발로 갖다 대기만해도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습니다. 이 기술을 자이안트 바바의 ''16문 킥''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자이안트 바바는 1999년 심장마비로 6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자이안트 바바에 비해 체격이나 실력, 외국에서의 지명도에서 뒤진 안토니오 이노끼는 전일본 프로레스링 협회의 바바와 갈라서 신일본 프로레스링 협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바가 프로레스링은 내부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정통을 추구한 반면, 이노끼는 "대외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순수한 레스링을 떠나 이벤트성 이종격투기도 마다하지 않는 파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이안트 바바와의 지명도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레스링 선수들과의 경기뿐 아니라 올림픽 유도 헤비급 우승자인 루스카 선수와의 이종격투기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고, 1976년에는 당시 전성기였으며 인기 절정이었던 알리와의 이종격투기도 추진하여 성사시켰습니다.

 

 알리를 움직인 것은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였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600만불로 낙착이 되었습니다. 경기는 일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경기 룰(rule) 갖고도 말이 많이 오갔었는데 결국은 알리에게 약간 유리한 쪽으로 정해 졌습니다. 

 정작 알리와 이노끼의 한 판 승부는 싱겁기 그지없는 경기였습니다. 알리의 강 펀치를 의식한 이노끼는 시종 들어누어 알리의 정강이에 헛 발질만 해대다가 15회전을 끝 마쳤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이노끼 발에 맞은 알리의 정강이가 시퍼렇게 부어 올랐습니다. 알리는 이 때 맞은 정강이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생 좀 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알리와 이노끼의 경기가 끝나자 알리는 " 이노끼는 매춘부다. 들어누어서 돈을 벌기 때문에" 라고 특유의 넉살로 이노끼를 조롱했습니다. 어찌됐든 이 경기가 지금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종격투기의 효시가 된것도 사실입니다. 이 경기를 통하여 친해진 이노끼와 알리는 그 후 벌어진 북한에서의 프로레스링 이벤트에도 동행했고 1998년 4월 4일 도꾜 돔에서 거행된 이노끼의 38년 레스링 생활을 마무리하는 은퇴식에도  알리는 참석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알리는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976년 6월 25일 우리나라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알리가 온다니까... 김포공항에서 부터 알리 일행이 무개(無蓋) 찦차를 타고 서울 장안으로 들어 오는데, 이건 무슨 국가원수 오는 것보다 대단했습니다.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으로 환영나온 인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젊은 사람들은 "알리 !" "알리 !"를 연호하며 알리 일행을 뒤따라 뛰었습니다.

 

  또 이노끼는 정치적 수완도 보여줘 1989년에는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프로레스링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선배인 김일 선수가 오랜 선수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는 일본으로 초청하여 치료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가슴 따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 끝 -

 

 

 

 

 

 

 


 

사진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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